역사고백 <51> 김시현
역사고백 <51> 김시현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27 14:44
  • 호수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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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을 넘어 의열투쟁에서 반독재 투쟁으로
▲ 영화 <밀정>의 의열단원 김우진의 실제모델인 김시현

올가을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밀정》의 주인공 김우진의 실제 모델인 의열단원 김시현이오. 작년 1천200만 관객을 모은 《암살》에 이어 역사에 묻힌 나와 이정출, 아니 황옥 동지를 세상 속에 불러주어 감사하오.


난 1883년 충절의 고장 안동군 풍산읍에서 태어났소만 17살에 이르러 서울에 와서 그나마 근대교육을 받았소. 28살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률학과에 입학해 고학한 후 35살 된 1917년 졸업하였소. 귀국하여 고향에서 이웃을 위한 인권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허나 1919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소.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하던 양민들을 잔혹하게 잡아 가두고 학살을 일삼으니 나도 시위에 동참하였소. 그러다 일본헌병대에 잡혔다가 풀려나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소.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여 각종 직제와 높은 자리도 생겼지만, 난 권력과 지위를 탐하지 않았으니 무장독립군들이 활동하는 만주로 발길을 돌렸소. 이곳에서 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였는데, 독립군들은 투지가 매우 넘쳐났으나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였소. 그래 내가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모집하려 했는데, 마침 의열단에서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가 발생해 나도 체포되고 말았소.

▲ 《동아일보》 1923년 4월 12일자 호외에 실린 김시현과 황옥의 모습

내가 서울로 호송될 무렵, 운명처럼 밀정 황옥을 만나게 되었소. 그는 경북 문경출신으로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의 후손인데, 상해 임정에 잠시 몸을 담근 바 있소. 허나 임정에서 동지들에게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자 귀국하여 경찰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뒤에서 돕고자 했소. 그래 조선총독부 경찰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임시정부에서 정탐한 내용을 밀고하여 경기도 경찰부 직속 도경부로 특채되었지요.


난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을 정탐하려는 황옥에게 민족을 배반하는 삶이 얼마나 욕된 일인지, 어렵지만 민족의 일꾼으로 일하다 죽는 삶이 얼마나 당당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었소. 이후 황옥 경부는 내가 출옥하자마자 여행증과 여비를 주어 상해로 망명하도록 도왔고,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에 나를 추천하여 참석하도록 주선해 주었소. 그곳에서 난 한국독립군의 최대 참변인 흑하사변과 관련한 재판의 배석판사로 활동하였고, 이어 1922년 2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전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표회의에 한인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게 되었죠. 이곳에서 평생 동지인 권애라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지요.


1923년 2월 황옥과 나는 천진에서 김원봉 단장을 만나 의열단에 정식 가입하며 독립을 위해 분골쇄신하기로 서약하였소. 그런 후 국내로 폭탄 36개와 권총 등을 들여와 조선총독부와 경찰서를 공격하기로 했지요. 무기는 만주 단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옮겨졌고, 서울로 무사히 옮겨져 황옥의 가까운 지인에게 맡겨졌소. 허나 이 지인이 밀정으로서 곧장 경기도경찰부에 밀고해 버렸고, 결국 황옥과 나를 비롯해 28명이 체포되고 말았소. 난 영화처럼 비밀을 지키려 내 혀를 잘랐으니, 평생 말을 잘 못하게 되었지요.


재판과정에서 황옥은 김원봉과 의열단원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며 눈물로 호소하여 온갖 비난을 받았지요. 허나 이는 의열단의 조직과 폭탄 제조과정, 운반경로 등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계책이었소. 그것은 김원봉 단장과 동지들이 그를 끝까지 믿어주고 해방 후 나와 같이 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참여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아무튼 난 징역 10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1929년 1월 출옥하였소. 난 곧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김원봉 단장과도 감격의 상봉을 하였소. 이어 의열단이 북경에서 운영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시인 이육사와 윤세주 등을 훈련시키는 중책을 맡았소. 그러다 1935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년동안 복역하였고 또 1944년 수감되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8·15 해방으로 출옥하게 되었소.


해방 후에는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와 좌우합작위원회 등의 위원을 맡고 1950년 안동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잠시나마 좋은 날도 있었죠. 허나 곧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서 전시의회를 운영해야 했는데,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와 친일파 등용, 민생파탄이 날로 심해져 울화통이 터졌지요. 그래 이 독재정권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다시 의열투쟁의 정신으로 돌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난 동지 류시태와 거사를 논의하고 6·25 발발 2주년 행사장에서 저격을 시도했으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해 체포되고 말았소.


결국 나는 살인미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8년간 복역하였소. 다행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풀려날 수 있었소. 특별사면은 받은 나는 곧장 민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도전해 국회에 입성하였소. 5대 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을 맡은 나는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려 했는데, 이듬해 박정희 소장의 5·16쿠테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니 희망도 날아가 버렸소.


가난에 시달리던 나는 1966년 1월 한 많은 세상을 뜨게 되었소. 내 일제와 싸우다 17년, 이승만 독재를 부수려다 8년 총 25년간을 감옥에서 살았고,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처지이오. 허나 의로운 일에 맹렬히 싸운다는 의열단 정신만은 또렷이 남기나니, 젊은이들이 역사의 정의를 위해 일해주길 바랄 뿐이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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