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2> 김창룡
역사고백 <52> 김창룡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0.11 13:39
  • 호수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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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헌병에서 반공 독재정권의 파수꾼이 되다

지난 호에 실린 의열단원 김시현의 역사고백을 잘 들었소. 난 그와 같은 항일 독립군에게 몰래 접근해 체포하는 일을 맡았던 일본밀정이었고, 해방 후 특무대장으로 그가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배후라는 사실을 밝혀내 구속시킨 장본인이오. 평생 그와 다른 길을 택한 나의 고백도 역사의 교훈으로 들어주길 바라오.


나는 1916년 11월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소. 오늘날 북한의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가 있는 곳에서 반공투사가 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한 난 15세에 영흥공립농잠 실습학교 2년과정을 마친 후 일본인 사장이 운영하는 제사공장에서 일했소. 그때부터 난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특유의 충성심과 헌신성으로 사장의 신임을 얻어 2년만에 만주 장춘역의 철도직원으로 취직했지요. 이곳에서도 일본인의 특혜를 받아 헌병부대에 군속으로 들어가니 은인들이 아닐 수 없지요.


25살이 된 1940년 난 장춘시에 있는 일본관동군 헌병교습소에 들어가 꿈에 그리던 일본헌병이 되었어요. 비록 조선인 보조역할에 불과했지만, 난 첩보로 악명 높은 야마가스사단의 헌병대에서 조선과 중국의 항일조직을 색출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지요. 이곳에서 난 2년간 철도노동자로 위장해 항일조직에 들어간 후 중국공산당과 소련에서 파견된 비밀활동가 50명을 체포하였고, 50건의 지하조직을 파괴하는데 기여하였소. 그 공로로 헌병 오장까지 승진하였지요.


허나 영원히 승전할 줄 알았던 일본이 항복하면서 난 졸지에 피난민 신세가 되어 귀향하게 되었소. 친일행적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던 1945년 10월 그만 철원보안서에 잡혀 최고전범군인으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소. 겨우 극적으로 탈출해 고향 친척집에 갔는데, 그곳 보안대에 체포돼 친일반동분자로 사형선고를 받았소. 가까스로 이곳을 탈출해 월남하니 1946년 초 서울에 거지꼴로 도착하였소.


먹고 살 길이 없었던 차에 난 공산당과 싸운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부산 제5연대에 입대하였소. 면접 당시에도 친일경력이 문제되었지만, 일본군에서 배운 좋은 지식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밝혀 입교하였지요. 곧 정보과 하사관에서 소위로 임관된 후 서울 제1연대의 정보주임으로 근무하였소. 난 옛 정보감각을 되살려 좌익색출에 나섰는데, 남로당 고위간부인 김삼룡 검거에 이어 초대 헌병사령관인 이병주 소령도 남로당원임을 밝혀 대위로 승진하게 되었지요.


이어 육군정보국 특별조사과의 장교로 근무하면서 군대내의 좌익계를 숙군하라는 지시를 받고 열심히 일했어요. 마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여수와 순천에서 터진 반란사건에서 토벌군 등 4천749명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요. 이 무렵 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부의 총책임을 알고 체포하게 되었는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간파한 내가 설득해 전향시켰지요. 그로부터 군부내 남로당원 명부를 입수해 73명을 검거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후일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을 살린 은인이란 평도 받게 되었지요.

▲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을 받는 김창룡 특무대장

이런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은 나를 친아들처럼 총애하며 2주에 1번씩 독대해 주셨지요. 난 그 신임으로 2년만에 소령-중령에 이어 대령으로 승진했고, 1951년 오늘날의 국군기무사령부인 특무부대의 부대장을 맡게 되었어요. 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까지 맡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비롯해 야당정치인도 빨갱이로 몰아 가두는 해결사 노릇을 맡게 되었지요. 이런 정권 파수꾼으로 활약하며 1955년 소장으로 고속 승진했다오.


허나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권력의 정점에 선 40살 나이에 그만 비명횡사를 당하고 말았소. 1956년 1월 30일 아침 7시 30분 경무대로 들어가려고 서울 원효로1가에 정차하던 내 차에 괴한들이 쳐들어와 총으로 나를 쏴 죽였소. 범인의 배후는 나와 함께 특무부대에서 근무한 현역 대령이었는데, 역시 일본 헌병출신으로 비리사실로 내게 쫓겨난 후 원한을 산 자이지요. 그는 사형판결을 받은 자리에서도 자신은 정치군인·친일군인을 처단했으니 명예로운 행동이었다고 자부하더이다. 또 내 첩보활동에 대해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김창룡의 손에 희생됐다”고 비난하니, 반공을 무기로 휘둘렀던 내 권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반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 대전현충원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창룡의 묘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만큼은 “나라가 망했다. 그런 애국자가 세상에 또 어디있냐”라며 애통해 하셨소. 그러면서 직접 빈소를 찾아와 조의를 표하고 날 육군 중장으로 추서해 주셨으며, 최초의 국군장으로 거행하도록 특전을 베푸셨지요. 내 묘주명도 써주시고 묘갈은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이병도 박사에게 부탁하셨지요. 허나 4·19혁명으로 그 분도 권좌에서 쫓겨나니 내 묘소도 안양의 야산에 찾는 이 없이 버려졌소. 그러다 1998년 대전 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옮겨졌는데, 매년 시민단체에서 “친일 정치군인 김창룡을 이장하라”며 시위하고 있지요. 하긴 독립군을 고문하고 빨갱이 조작에 나섰던 내가 국립묘지에 독립·민주투사들과 같이 묻혀있으니 민망하고 거북할 따름이오. 역사의 현명한 심판을 기대하는 바이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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