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3> 박정희
역사고백 <53> 박정희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1.08 14:49
  • 호수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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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불행한 대통령이 되지 않길 바랐건만…

참담하고 부끄럽소. 아비인 나를 롤 모델로 삼아 그 후광으로 대한민국 최고권좌에 올랐건만, 정작 40년 걸친 요부들의 주술을 떨치지 못해 스스로 쫓겨날 처지에 몰리다니 불행한 가족사를 넘어 서글픈 민족사가 아닐 수 없소. 헌정사 최초로 검찰 조사받아야 하는 대통령, 고교생조차 하야를 외치는 지지율 5%의 식물정부, ‘이게 나라냐’는 절규가 해외뉴스로 날아가 추락하는 국격…. 왜 이런 참담함이 유전되었는지 나도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구려.


난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 퇴락한 양반가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소. 어릴적 일본군 야외훈련을 구경하며 군인이 되기를 꿈꿨던 난 존경하는 셋째 상희형의 권유로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지요. 1937년 문경의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교장이 내 장발머리를 문제 삼으니 2년만에 학교를 박차고 나갔지요. 그런 후 긴 칼을 찬 군인이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을 쫓아 무작정 만주의 장춘으로 가 만주국이 만든 신경군관학교를 자원하는 모험을 감행했지요.


1942년 3월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졸업식장에서 일본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하여 금시계를 하사받았어요. 이때 다가키 마사오라 개명한 난 “일본인보다 더 충성스럽다”는 교장의 추천을 받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는 특전을 받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조선인으론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기도 했죠. 1944년 7월 만리장성 북쪽 열하성에서 만주군 보병 제8단의 부관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이곳에서 난 항일 중국군인 팔로군을 토벌하는 데 참전하였지요.


1945년 8월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일본군이 항복을 하니, 난 졸지에 무장해제 당한 채 쫓겨나게 되었소. 그러다 북경에서 광복군에 편입되었는데, 그때 날 심문하던 장준하 대위는 해방후 재야인사가 되어 내 친일전력을 까발리며 기회주의자라 비난하여 애를 먹었지요.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 난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어요. 이 곳에서 내 악연인 김재규도 만났지요. 그러다 대구 10월 항쟁의 주모자로 활동하던 상희 형님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고, 난 원수를 갚으려는 심경으로 좌익계에 가담하게 되었소. 허나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는데, 군부 내 남로당 조직명단을 고발하여 살아남게 되었소.

 

▲ 3선 개헌으로 1971년 대통령 유세에 나선 박정희 후보와 육영수 여사

무급의 문관신분으로 정보국에 겨우 남아있던 차에 전쟁이 터졌고, 난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의 도움으로 소령에 이어 준장,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었소. 드디어 1961년 5월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에 성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게 되었소. 정치를 안정시킨 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나의 약속은 권좌에 앉고 보니 지켜질 수 없었고,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드디어 1962년 5대 대통령이 되었지요. 이 무렵 북으로 간 형의 친구 황태성이 밀사로 파견되어 왔지만, 난 그를 사형시키지 않을 수 없었지요. 곧 처남 김종필에게 중앙정보부를 만들게 하여 공포정치를 통해 1967년 재선, 한일국교 정상화, 월남파병 강행, 그리고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세 번째 장기집권에 이르렀지요.


1972년 북한의 위협에 일사분란하게 대응하자는 명분으로 유신체제를 만든 나는 수차례에 걸쳐 긴급조치를 발동해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운동을 막았지요. 새마을운동과 7.4남북성명으로 분위기를 띄워보기도 했지만, 12시 통행금지와 장발단속, 그리고 숱한 시국사건 등으로 얼룩진 ‘겨울시대’였죠. 그러다 1974년 ‘청와대의 야당’이라 불리던 내 부인 육영수가 재일교포 청년에게 총 맞아 죽는 불행을 겪게 되었는데, 그후 내 판단력도 흐려지고 아집만 늘더이다. 자식들도 어미 잃은 허망한 마음에 이상한 이들을 가까이 하게 되니, 요즘 시중에 안주거리가 되고 있는 이들과의 잘못된 만남도 이 무렵부터이지요. 종교집단의 사기와 횡령, 국회의원 공천까지 이권을 챙기는 그 사기꾼을 불러 혼쭐을 내려 했으나, 친구도 없이 새마음봉사단에만 맘을 두는 자식이 측은해 그냥 둔 게 오늘의 화근이 되고 말았소. 그런 비리와 부정이 쌓여 결국 나 역시 1979년 10.26 최측근이며 군대동기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의 잘못된 만남

허나 공주처럼 곱게 자란 내 딸은 미처 요부들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 이름과 영남세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지요. 1983년 육영재단에서 요부들의 추악한 전횡을 보았음에도 이 효녀는 대통령 자리에서조차 그 요술을 끊어내지 못해 제 손으로 임명한 검찰의 조사를 받아야할지 모를 신세가 되었으니, 참으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내년이 내 태어난지 100년이라 광화문에 동상을 세워준다 전집을 내준다며 고집하는 후배들도 있지만, 과연 이 엄중한 시국에 무슨 욕을 당할까 염려되지 않을 수 없소. 이 업보를 어떻게 씻어야 할지, 국립묘지 명당자리에 누웠어도 편치 않아 몸을 뒤척일 뿐이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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