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4> 김일성
역사고백 <54> 김일성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1.15 23:00
  • 호수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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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운동가에서 ‘세계의 깡패’가 되기까지

지난 호 남쪽의 내 18년 원수의 역사고백과 자식걱정을 잘 들었소만, 세상이 다 아시다시피 북쪽도 심란하기는 매일반이오. 게다가 ‘강성제국’을 꿈꾸는 트럼프가 백악관을 차지해 한판 전쟁이 일어날지 평화협정을 맺을지 갈피를 못잡는 마당에 손주녀석조차 핵실험한다 미사일 발사한다 떠들고 있으니 불안들 하실거요. 내 일찍이 남북 8천만과 2천만 해외동포들께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고, 오늘날 최악의 위기상황을 만든 죄인의 한사람으로서 송구스럽기 그지없구려.


나는 대동강 만경대, 즉 평남 대동군 고평면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김형직과 강반석의 장남으로 태어났소. 본명은 김성주이나 개명하였소. 1912년생이니 이북에선 주체 1년이란 연호를 쓰고 생일인 4월 15일을 태양절로 추석보다 큰 명절로 삼으니 쑥스럽기 그지없구려. 1926년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부친이 있는 만주로 이주하여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했다가 타도제국주의동맹과 반제청년동맹 등 항일단체에 가입하였소. 만주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길림감옥에서 6개월간 투옥되었지요. 18살 어린 나이라 풀려났지만, 이때 다른 동지들처럼 옥사했다면 한국현대사가 많이 바뀌었을게요.

▲ 1937년 만주에서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출옥 후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항일유격대를 조직해 백두산 밀림지대와 송화강유역에서 게릴라활동을 시작했지요. 1934년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항일연군의 제1로 2군에서 160명을 이끄는 중대장으로 6사장을 맡았소. 2군의 대부분이 조선인 출신들이었기에 우리끼린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불렀소만, 공식 명칭은 물론 아니었소. 이어 의열단 출신 오성륜이 만든 조국광복회에서 민족대단결을 외쳤고, 국내의 호응을 얻어 1937년 6월 압록강 작은 마을 보천보를 습격하였소. 큰 승전은 아니었지만, 국내 동아·조선일보에 내 이름이 크게 실리면서 이후 항일영웅으로 불리우는 결정적 장면이 되었소.


이후 일본군 추격이 맹렬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고난의 행군’을 거듭해야 했죠. 이 무렵 나와 대원들간의 결속은 매우 단단해 나중에 공화국 건설에 크게 쓰였지요. 허나 일본군과 간도특설대의 맹렬한 추격으로 1940년 10월 결국 소련 영내로 피신하였는데, 새 부대 정식이름은 ‘소련 붉은군대 제88특별저격여단’이었소. 이곳에서 1백여 한인들과 함께 조선공작을 준비했는데, 마침내 1945년 9월 19일 군함을 타고 감격스런 환국을 하게 되었지요.


소련군에게 내가 받은 직책은 평양주둔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었어요. 10월 14일 평양시민 7만명이 열어준 소련군 환영대회는 훗날 ‘김일성장군 조국개선대회’로 바꿨지만, 내가 너무 젊어 가짜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 들였죠. 이어 최초의 반공시위인 신의주학생사건을 잘 처리해 신임을 얻어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차지했지요. 당시 평양에는 민족지도자 조만식선생과 소련국적의 허가이, 중국 연안에서 무장투쟁한 무정 장군, 남로당을 이끈 박헌영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난 소련군정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친일파 청산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해 인기를 얻었지요. 분단을 막겠다며 평양을 찾은 김구 선생의 노력과 관계없이 우리는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곧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고 난 37세에 수상자리에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되었소.


새 공화국 정부에 소련은 차관과 각종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국공내전에서 승전한 모택동 주석은 조선족 병사 5만명을 우리에게 보내주었소. 이승만 정부에 쫓겨온 박헌영 부수상은 인민군이 남진하면 당원 20만명이 봉기하니 조국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날 부추겼어요. 결국 난 조국해방전쟁이란 명분을 안고 1950년 6월 남한을 전면 공격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어요.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기대했던 남로당 봉기는 없었고 외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막지 못해 압록강변까지 쫓기고 말았소. 다행이 중국군 도움으로 휴전하게 되었지만, 민족과 역사에 안긴 상처가 너무 크오.


전쟁 후 책임론이 거세어지자, 난 무정과 허가이·박헌영을 반국가·반혁명 간첩죄로 숙청한데 이어 연안파와 남로당파도 모두 제거하였소. 그 빈자리에 나와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전우들로 채운 후 천리마·청산리운동을 벌이며 유일지도체제를 만들었지요. 1972년 남한에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나도 아들 정일과 함께 주체사상화를 선포하니 기어코 3대세습 왕국을 만들었지요.

▲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이후 1993년 아들에게 국방위원장을 물려주고 핵 확산금지조약도 탈퇴하며 강성제국의 꿈을 키웠지만, 미국과 서방제국의 경제봉쇄와 중국·러시아의 개방·개혁화로 우리만 고립되고 경제는 파탄나고 말았소. 이에 비해 남한은 경제성장에 이어 민주화도 이룩하니 내 부럽고 부끄러워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화해의 물꼬를 트려 했지요. 허나 회담을 얼마 앞둔 1994년 7월 8일 세상을 떠 참회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통탄스럽소. 아직도 가난한 세습독재국가, 세계의 깡패 소리를 듣고 핵전쟁 공포를 남겨주었으니 부끄럽소. 염치없지만, 부디 남북의 청년들이 나를 딛고 일어나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민주와 평등의 통일한국을 만들어주시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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