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5> 여운형
역사고백 <55> 여운형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1.22 11:07
  • 호수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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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포용으로 극단의 좌우익을 넘어서라

앞서 남과 북 8천만 동포들과 세계인들에게 고통과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죄인들의 역사고백을 잘 들었소. 친일 반공주의와 공산독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끄러운 우리 현대사의 초상이 아닐 수 없소. 이제 극단의 이념대립과 권위주의를 넘어야할 마당에 나의 경험담이 젊은이들에게 평화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소.

▲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은 몽양 여운형

나는 꼭 130년 전인 1886년 4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 출생하였소.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꿈꾸시던 할아버지에게 사상적 감화를 받은 나는 고향에서 사서오경을 배우다가 신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의 배재학당과 흥화학교에서 수학하였소. 그러다 을사늑약에 낙심하여 고향에 돌아와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학교를 세웠소만, 이도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고 말았소.


1914년 28살 늦은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해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였소. 졸업 후 상해에서 중국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신해혁명을 일으킨 손문 초대총통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런 후 1918년 신한청년당과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어요.


1919년 고국 방방곡곡에서 항일만세시위가 벌어지자, 난 다시 손문 총통에게 부탁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강화회의에 한인대표로 김규식 박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자주독립을 요구하도록 했지요. 이어 상해의 임시정부에 참여했는데, 그해 11월 일본정부에서 시국토론회를 열자고 해 내가 도쿄로 날아갔지요. 적지 한가운데에서 일본 극우파 장관과 육군대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을 만나 일본의 조선침략을 비판하고 식민통치의 포기를 권유한 바 있지요. 난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느냐는 정무총감의 질문에 대해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느냐고 반문했고, 자주독립은 우주자연의 법칙이며 모든 민족의 권리라고 역설했지요.


무사히 상해로 귀환한 난 중국 피서지에 온 외국 대사와 정치인들 앞이나 미국 국회의원들에게도 한국독립에 대해 연설하여 호응을 얻었죠. 그런 후 공산혁명을 이룬 러시아정부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노동자대회에 김규식·김시현 등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지요. 난 이곳에서 세계혁명사의 거인인 트로츠키와 레닌 등을 만났고, 여러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지요. 이후 난 손문의 중국국민당에 가입해 혁명군을 도왔고, 그 공로로 국민당 전국대표자대회에 내빈으로 초청되어 한국대표로 연설도 하였지요.


1929년 6월 44세 나이에 상해 복단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인솔해 필리핀 수학여행에 다녀왔는데, 야구구경을 갔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왔지요. 내게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씌운 일제는 3년형을 언도하였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어요. 출옥한 이후 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게 되었는데, 진보적인 사설과 애국적인 보도로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요. 이 무렵 조선체육회의 회장을 맡아 건강한 육신 속에 건강한 독립정신이 길러진다고 강조했죠. 그러던 중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해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었고, 나도 사장직에서 물러났지요.

 

▲ 해방직전까지 항일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여운형(사진 중앙)

이후 중국본토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내게 전쟁협력과 창씨개명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했지요. 난 일본 도쿄에 머물다가 미군의 공습을 목격하고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 확신하였지요. 그러다 일제 정보기관에 체포되어 1년 징역을 살게 됐고, 출옥 후 곧장 비밀리에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했으니 그때가 1944년 8월이었죠. 동맹의 맹원은 많게는 10만명에 이르렀는데, 서로 이름을 말하지 않고 문서를 남기지 말며 말을 하지 않는다는 3불원칙으로 비밀을 유지하여 무사히 해방직전까지 활동하였지요. 그런 노력으로 1945년 8월 16일 곧장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어요.


헌데 아직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지 못한 채 미군이 들어오므로 우린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군정과 협의하기 위해 인민공화국을 만들었고, 미군정의 장관과 면담도 하였어요. 허나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투쟁으로 좌우익이 갈라지고 말았는데, 난 좌우익의 합작을 주장하며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의장을 맡았지요. 난 박헌영의 공산당 노선과는 달리 좌우익이 협력해 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고, 평양의 김일성과도 만나 좌우합작과 미·소 협력을 주장했지요.


허나 냉전체제와 극단적인 좌우익 세력은 나를 ‘분열주의 빨갱이’로, 또는 ‘사대주의 매국노’로 매도하였어요. 결국 해방직후부터 11번씩이나 좌우익의 테러를 피해왔지만, 기어코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괴한들의 피습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었지요. 내 죽은 지 27년 만에 범인들이 신문지상에 자백했다 하는데, 모두 극우파 반공주의자들이었다 하오. 남과 북이 극단적인 독재정권과 세습권력에 의해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새가 두 날개로 날듯이 극단의 좌·우익을 넘어 건강한 자유·평등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하는 바이오.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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