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56> 장준하
역사고백 <56> 장준하
  •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2.06 10:51
  • 호수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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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게 민주사회를 만들어주오

아버지에 이어 딸까지 국민에게 불행과 자괴감을 안겨준 패륜, 자신이 임명한 검찰에게 수사를 받아야 하는 불행한 대통령, 일본 극우파에 이어 군대까지 한반도로 다시 끌어 오려는 친일 독재정권. 차마 2016년 개명천지에서 믿기지 않을 일들이 매일 터져 나오니 50년 전 박정희 정권과 거리에서 싸우던 나의 모습이 오늘도 광화문 거리에 가득하구려.


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에서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소. 부친의 독립운동 일로 세 살 때 삭주로 이주한 나는 만주의 용정에서 성장하였소. 이곳 광명학교에서 민족시인 윤동주와 민주투사 문익환 목사 등과 벗하며 함께 호연지기를 길렀지요. 15살 무렵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신성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한 후 정주의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한 바 있지요.

 

▲ 1933년 숭실중학 시절의 장준하(맨왼쪽)와 문익환, 윤동주

난 독실한 기독교도인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였소. 윤동주와 문익환도 이 무렵 일본 유학길을 떠났는데, 1944년 학도병 강제징집이 우리 세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소. 시집발간을 준비하던 동주는 저항운동 혐의로 차디찬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었고, 징집을 거부한 문익환은 퇴교되어 만주 봉천신학교로 옮겨갔으며 난 결혼 1주일만에 아내를 남겨두고 중국전선으로 끌려가게 되었지요. 난 아내에게 탈출에 성공하면 ‘돌베개’를 찾는다는 암호를 편지에 담아 보내주기로 약속했지요.

 
중국 서주지구에 배치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던 난 동지 2명과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웠소. 드디어 6개월의 준비 끝에 1944년 7월 7일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국민당군에 합류하였소. 이곳에서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동지를 만나 동행하여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중국중앙군관학교 분교로 찾아가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대하였지요. 이어 1945년 1월 30일 53명과 함께 일본군 점령지역을 피해 마침내 임시정부 요인들이 있는 중경으로 찾아가 감격의 6천리 장정을 완수했지요.

 

▲ 1945년 광복군 첩보부대 당시의 김준엽과 장준하

나는 곧 한국광복군 2지대장인 이범석 장군에 배속되어 서안으로 가게 되었고,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첩보대에 소속되었어요. 이 부대는 한미합작으로 국내로 잠입해 지리산에서 항일활동을 펼칠 계획이었는데, 일제가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우리 힘으로 해방시키지 못해 미·소 강대국에 끌려갈 수 있음을 통탄해하시던 김구 주석의 우려대로 11월 23일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자격도 받지 못한 채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야 했지요.


해방된 조국은 친일파들이 활개 치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되고 말았소. 난 비상국민회의 서기를 맡으며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지만, 김구 주석이 암살당하고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등용해 극우반공 독재가 되는 걸 막지 못했어요. 보다 못해 1953년 잡지 <사상계>를 창간해 독재권력을 비판하니,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여해주더이다.


독립전쟁에서 반독재운동으로 전환한 나의 투쟁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졌소. 해방 당시 중국에서 일본 관동군 중위로 독립군 때려잡은 그의 전력을 조사한 바 있는 나였기에 “박정희 씨만은 절대 대통령을 할 수 없다. 그는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요, 사상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지요.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자 이를 신을사늑약이라 주장하여 탄압을 받게 되었지요. 곧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는데, 1967년 옥중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지요.


1971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된 나는 수기 『돌베개』를 발간하였어요. 이 책에서 난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라는 결의를 밝혔지요. 그러다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해 나를 구속해 징역 15년형을 내렸어요. 다행이 가석방되었지만, 곧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보내 유신헌법 폐기와 민주헌법 개정, 구속자 석방, 자유언론 보장 등을 요구했지요.


나아가 난 김대중 의원과 연합하여 유신철폐를 위한 2차 100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였어요. 이런 나의 움직임은 중앙정보부 6국에서 ‘위해분자 관찰계획’이란 보고서로 상세히 파악되었는데, 이 개헌운동을 와해시키라는 상부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후일 알려졌죠. 그런 후 4개월도 지나지 않아 난 1975년 8월 17일 포천의 약사봉으로 산행을 나섰다가 낭떨어지로 굴러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지요. 나의 억울한 죽음은 당시는 물론 2012년 파주 통일공원으로의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이 드러나면서 다시 불거졌는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믿소.


내 박정희의 집권을 막지 못해 오늘날 그 고통이 후손들에게 이어져 송구하오만,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의 올곧은 정신을 남겼으니 이를 또다른 돌베개로 삼아주길 바라오.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매진하는 민주시민이 되어주기 바라오. 독립전쟁·호국·민주영령들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그대를 후원하리니.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김명섭 역사 칼럼니스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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