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봉 팝페라가수 : 길거리에서 피어나 무대에서 만개하다
최성봉 팝페라가수 : 길거리에서 피어나 무대에서 만개하다
  • 이상윤 기자
  • 승인 2017.03.28 11:00
  • 호수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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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당신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름, 부모, 집 없이 고되게 자란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여기 갈아입을 옷, 먹을 수 있는 음식, 잘 수 있는 집이 없어 굶어 쓰러지고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던 사람이 있다. 그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2011년 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놨고,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20년을 넘게 하루살이 인생을 살았던 그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청년이 된 후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팝페라 가수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성봉(28) 씨를 지난 14일 역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기”

▶ 어린 나이지만 직업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거리를 돌아다니며 껌을 팔았다. 솔직히 말해 나의 과거사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 갑작스럽게 받은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됐다. 그래서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 고아로 자랐다고 들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있기 어려운 비극적인 경험을 몇 번이나 겪었다. 세 살 때 고아원에 버려지고, 다섯 살 때는 고아원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도저히 못 살겠다고 생각한 건지 고아원을 도망쳐 나와 무작정 대전으로 향했다.

▶ 대전에 연고라도 있었나. 
연고가 있었다면 버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단이나 공중 화장실에서 잠을 잤고, 살기 위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고 변기통 물을 마셨다. 길거리나 나이트클럽에서 껌과 에너지 드링크를 팔았다. 유흥가에서 전전긍긍하며 겨우 살아가는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조폭이었다. 욕은 물론이고,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간 같은 나쁘고 더러운 일들은 일상이었다. 심지어 땅에 묻혀 죽을 위기에 처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길거리 생활만 10년 가까이 했다.

▶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도 안 된다.
어릴 적 나에게 삶의 원동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살아야 했으니까 서바이벌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하지만 내가 성악을 접하고 난 뒤에는 노래하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는 나에게 삶의 원동력 그 자체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나는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일상에서 도망갈 수 있었다. 미치게 도망가고 싶어서 미치게 노래했다.

▶ 성악은 어떻게 접하게 된 것인가.
참 아이러니하게도 중학생 때 나이트클럽에서 성악을 처음 들었다. 나이트클럽 하면 대부분 신나고 밝은 분위기를 생각할 것이다. 예상대로 그때 그 성악가는 나이트클럽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근처에는 사람도 없었고, 자신도 그것을 아는 모양인지 혼자 구석에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의 모습이 그 사람에게 겹쳐서 보였다. 외롭게 서 있던 그에게 동질감이 들었고 그의 성악에 강하게 매료됐다. 딱 그때였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 비슷한 상황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지치고 숨 막히는 삶 속에서 힘을 내라는 말은 오히려 응원이 아닌 희망 고문일 뿐이다. 정말 힘들 때는 힘내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무엇에 빠졌을 때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와 현실이 당장 나를 괴롭히고 너무 힘들어도 작은 불씨 하나는 살려둬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신이 허락하여 나에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기필코 잡아야 한다.

▶ 그 작은 불씨가 ‘코리아 갓 탤런트’였나.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노래를 포기하고 잠시 현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참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중 스승인 박정소 선생이 나에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안했고 출연하게 됐다. 출연하는 동안 나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고, 나의 노래로 세상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후회 없는 무대를 하려고 노력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노래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나에게는 환상적인 무대였다.

▶ 그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코리아 갓 탤런트를 출연하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20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항상 갈구하고 원했던 일이었다. 누군가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내 노래에 감동을 받고, 또 누군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느낌은 그 당시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분이 방송을 보시고 건네준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나를 웃게 만들었고, 행복을 선사했다. 어떤 분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며 개인적인 연락이 왔는데 너무 감사했다.

▶ [공/통/질/문] 본인을 표현하는 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애석하게도 이 질문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반갑지만은 않은 질문이다. 온통 검붉은 색이다. 유흥가 화장실, 길바닥이 내 집이었다. 10년을 넘게 어른들에게 껌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사람을 증오했고 내 인생을 저주하며 산 것이 유년 시절 기억의 전부다. 아직도 나의 어린 시절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 이 기사를 읽을 20대 청춘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요즘 학생들이 많이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지나치게 학점과 취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성적과 취업만을 성공의 잣대로 두려고 한다. 내 삶을 통해서 봤을 때 인생을 흑백논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와 같이 딱 정의할 수 없다. 인생은 어디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기 참 힘들다. 내 인생을 봐라. 그 누가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나도 아직 내 인생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저 일개 시민이다. 그러니 학점이 조금 낮게 나왔다고, 취직이 안 돼서 힘들다고 너무 실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Epilogue
인터뷰 초,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최 씨가 반갑다며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 밝은 모습  뒤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이 지나갔을까. 그가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의 뼈아픈 기억과 수많은 경험이 스며들어 있었다. 기자가 만난 최 씨는 TV에 나오는 가수도,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다. 그저 원래 알고 지냈던 동네 형 같은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최 씨와 기자 간의 어색한 기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담을 나누기도 하고 기자의 사적인 고민도 상담해주던 최 씨. 학교로 돌아가는 길 기자는 잠시 서서 생각해본다. 기자로서 만났지만 그의 친구가 돼 돌아간다고, 최 씨를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은 올해의 큰 행운이었다고.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리허설 중인 폴 포츠(좌)와 최성봉(우)

이상윤 기자
이상윤 기자

 32161368@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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