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식 발레리노 : 춤추던 나비, 새벽에 날개를 펴다
정운식 발레리노 : 춤추던 나비, 새벽에 날개를 펴다
  • 이정숙 기자
  • 승인 2017.09.05 17:28
  • 호수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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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레로 Love, Bolero…'공연을 하고 있는 정운식 씨

<Prologue>

 올해 하반기 9급 공무원 공채시험의 경쟁률은 무려 301.9대1을 기록했다. 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시대의 동향이 반영된 결과다. 청년들에게 ‘열정’과 ‘꿈’은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순수한 열정 하나에 온 인생을 바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 무대 위에서 매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가 있다. 바로 한국 최고령 발레리노 정운식(51) 씨. 운동선수의 평균 은퇴시기가 20대 중반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의 몸짓은 더욱 빛이 난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평화롭던 지난 2일, 여전히 무대 위에서 꿈을 꾸는 정 씨를 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에서 만났다.

 

▶ 발레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친구들과 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무용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선천적으로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만난 친구들이 무용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나도 뭔가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으로 땀이라는 걸 흘려봤다. 그때 느낀 카타르시스를 잊지 못한다.

 

▶ 남학생에게 무용이나 발레는 꺼려지는 분야가 아니었나.

아버지가 미쳤냐고 하셨다. 그나마 어머니께서 개방적이신 분이라 무용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남자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도 이상하게 봤고 발레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쓴 소리를 많이 들었다.

 

▶ 남들보다 늦은 시기에 무용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발레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위해 친구관계 등 많은 것을 포기했다. ‘딱 한 가지만 갖자’라는 생각을 항상 했고, 그게 발레였다. 발레를 하면서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뭐든지 양보하고, 포기하고, 내어주면서 어설프게 다른 무언가를 욕심내지 않았다. 지독히 외로운 시간, 혼자만의 고독과 싸우는 시간이 처절하리만큼 힘들었다.

 

▶ 발레리노로서 선보인 첫 무대는 어땠나.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에서 ‘Being’, ‘현존’이라는 작품을 선보인 게 첫 공연이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창단 공연이었고 제임스 전 안무가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첫 작품이자 아내와 함께 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그만큼 감회가 새로운 작품이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공연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볼레로’와 ‘RAGE’이다. 이 둘은 내겐 잊지 못할 작품이다. 현대무용전공으로 무용을 시작했는데 우연히 본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의 ‘볼레로’가 나를 발레의 길로 이끌었다. 수십 명의 발레리노가 아래에 있고 아주 커다란 원탁 위에서 주연 무용수가 춤추는 장면을 보고 꼭 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베자르의 단원으로 계셨던 제임스 전 선생님께서 새로 구성한 볼레로를 내가 주연 무용수로서 이어받았다.

▲ '볼레로 Love, Bolero…'공연의 한 장면

 

▶ 정통발레보다 모던발레에 매력을 느낀 이유가 있다면.

모던발레와 나는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 닮았다. 서민 중심적이고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정통발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중심의 발레지만 모던발레는 서민들의 애환을 춤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내 오랜 가치관과 부합하는 작품이 더 많기도 하다.

 

▶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궁금하다.

내게 예술은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무대로 올려서 조명하고, 그 무대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소통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그들이 다른 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넓히는 힘이 예술에 있는 것 같다.

 

▶ 현존하는 국내 최고령 발레리노다. 50대 무용수의 삶은 지난 40대와는 다를 것 같다.

생활패턴은 같다. 현역 무용수로 무대에 임하려면 새벽에 일어나 짜인 시간표대로 철저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50대가 되니 역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부상도 많아지고 고관절이 닳아 고통 속에서 춤을 추고 진통제를 먹고 무대 위로 올라간 적도 많다.

 

▶ 본인의 한계를 가장 크게 체감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무대 위에서 몸의 한계를 느낀다. 그 한계를 훈련으로 이겨내려고 하다 보니 관절이나 연골이 닳아서 재생이 안 될 정도다. 춤이 간절한데 출 수 없는 상황을 자주 겪는다. 그래서 근육이나 인대를 늘리는 식으로 버티곤 한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춤 출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다.

 

▶ 예술인으로 살면서 현실적인 어려움도 겪었을 것 같다.

역시 금전적인 문제다. 특히나 무용수들은 더욱 힘들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넉넉하게 생활하기에 무용수가 얻는 수익은 제한적이다. 무용계의 열악한 구조가 춤을 사랑하는 많은 무용수들을 떠나게 해서 안타깝다.

 

▶ 그럼에도 평생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동력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 예술인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해보지 않으면 10년 뒤, 20년 뒤를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은 중간에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이렇게 끝까지 무대에 남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진정으로 무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시간동안 내 모든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지 않았는가.

 

▶ 본인에게 무대가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큰 것 같다.

무대는 즐겁지만 두렵고, 벗어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무대 위에서 30년을 살아왔고 그게 나의 인생이 됐다. 젊었을 때부터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무대이기도 하다. 마치 아내 같다. 무서우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평생 함께 가야 하는 그런 존재이다.

 

▶ 삶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표에 얼마나 다가섰는지 궁금하다.

지금처럼만 살고 싶다. 무대 위에서 지금껏 내가 쌓아온 것을 하나하나 증명해 나가고, 내가 느낀 것을 관객들과 오롯이 공유할 수 있는 것. 아울러 돈이나 사회적인 잣대에 억압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신중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 [공/통/질/문] 본인을 표현하는 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흰색. 흰색은 처음과 끝이 똑같은, 때 묻지 않은 색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무대 위의 ‘열정적인 무용수’로 남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쓸어주고 싶다.

 

▶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20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지금 당장 눈앞에 또렷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나에게 꼭 맞는, 나만의 시간은 언젠가 꼭 온다. 그런 믿음을 잃지 않고 선뜻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이 잘 되고 내가 안 될 때에도 남에게 박수쳐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언젠가 나에게 찾아올 때를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Epilogue

 손에 쥔 것들은 포기하면서도 끝내 마음 속 간직한 신념을 내려놓지 않을 용기가 당신에겐 있는가. 만약 당신이 사회의 흐름이 두려워 품고 있던 꿈을 외면했다면, 쉰 한 살의 무용수가 건넨 목소리에 집중해보라.

그가 그려온 삶의 궤적은 꾸며진 무대처럼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만이 그의 현 위치를 설명해준다. 정 씨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벽 속에서 홀로 춤을 췄고, 연골이 닳아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매일 같이 연습실로 향했다. 그 발걸음 속엔 그간 흘린 땀방울과 그의 강인한 정신력이 녹아 있었다.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나’ 하나 조차 정복하지 못할 의지로 타인과 경쟁하려 들었던 지난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 어떤 명언보다도 진솔한 그의 삶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이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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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lentle2@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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