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인 캠퍼스 12. 세잔 <벨뷔에서 본 생트빅투아르 산>
캔버스 인 캠퍼스 12. 세잔 <벨뷔에서 본 생트빅투아르 산>
  • 단대신문
  • 승인 2017.11.21 17:15
  • 호수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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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 관계 결합으로 새로운 회화 비전 달성
▲ 세잔 Paul Cezanne, 벨뷔에서 본 생트빅투아르 산, 73x92cm, 1885.

세잔이 현대회화에 끼친 영향은 다윈이 현대 인간학에 끼친 영향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미술수업은 어려움 투성이었다. 원래 그는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화가가 되려는 열망에 중퇴를 하고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2년 후의 입학시험에서도 그는 또 실패했고, 살롱에도 26세와 28세 때에 응모했으나 연거푸 낙선의 실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인상파 화가들과의 친교를 통해 제작에 열중하면서 35세의 나이로 제1회 인상파전에 <오베르의 풍경>, <목맨 사람의 집> 등을 출품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무명화가나 마찬가지였던 세잔이었지만 생활고에는 시달리지 않았다. 부유한 아버지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 그를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작품을 사줄 고객을 찾아 헤매지 않고 열심히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잔이 이룩하고자 했던 목표는 일견 불가능한 듯 보이는 예술적 이상이었다. 인상파 회화의 빛과 색채를 그대로 살리면서 화면에 균형감 있는 명료한 구조적 질서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인상파의 색채효과는 필연적으로 대상의 확실한 윤곽과 입체성을 없애버려 화면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파의 색채효과와 명료한 구조적 질서감각은 모순적인 관계로 보이는 것이다. 세잔은 이렇게 모순적 관계에 있는 양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적 비전을 달성하려고 했던 화가였다.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서 홀로 무모한 듯 보이는 그 연구에 전념했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됐다. 자유로운 필촉과 밝은 색채효과와 함께 명료한 구조적 질서에 의한 화면구성이 그의 그림에서 달성되었던 것이다.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1895년 개인전에서 그동안의 그림들을 선보였을 때, 모네와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은 감격에 찬 찬사를 보냈다.

<벨뷔에서 본 생트빅투아르 산>은 세잔의 회화적 이상이 잘 구현된 작품이다. 세잔은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물의 덩어리감과 균형 잡힌 화면의 구조적 질서를 이 그림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있다. 세잔의 필촉은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럽고 미묘하다. 생트빅투아르 산은 붉은색과 황색과 보라색과 푸른색의 자유롭고 짧은 붓 터치에 의해 그 전체 덩어리가 형성돼 있다.

산의 다양한 굴곡은 여러 방향의 필선과 색채처리로 암시돼 변화 있는 시각적 울림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균형 잡힌 견고한 산의 윤곽과 형태에 의해 구조적 통일감을 얻고 있다. 산 아래에 그려진 긴 다리와 길은 수평적 움직임을 보이며 유동적 필촉에 의한 산의 다양한 굴곡을 진정시키고, 다리 아래쪽에 그려진 집과 나무들은 견고한 형체감 속에 수직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수직적 움직임은 다리와 길의 수평적 흐름에 대응하면서 화면을 질서 있고 평화로운 기운으로 안정시키고 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밝고 변화 있는 색채의 울림과 함께 윗부분의 유동적 필선의 움직임과 중간부분의 수평적 흐름, 그리고 아랫부분의 수직적 흐름에 의해 변화가 있으면서도 구조적인 조화와 통일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세잔이 1895년에 가진 첫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 화가들만이 아니라 많은 미술애호가들의 호평을 받고 그는 미술계의 중요한 화가로 부각되었다. 그의 나이 56세가 돼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성공한 화가가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와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에밀 졸라Emile Zola(1840~1902)조차 소설에서 세잔을 낙오자로 묘사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준 일이 있었는데, 세잔은 그동안 모든 이들의 몰이해와 무시에 신경 쓰지 않고 무서운 열정으로 창작에 전념해 회화적 성공을 달성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부친이 10년 전 작고하면서 물려준 막대한 유산도 그가 일상생활에서 해방돼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제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세잔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899년 쇼케의 컬렉션을 매각할 때 세잔의 그림 32점은 작품 당 평균 1천6백 프랑에 팔렸고,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의 <프랑스 예술 100년 展>을 통해 그의 명성은 국내외로 널리 퍼져나갔다.

세잔은 자연의 모든 사물은 ‘원통형과 원추형과 구형’을 기본 형태로 하고 있다고 일찍이 간파한 바 있으며, 과감하게 화면에 복수 시점을 둠으로써 큐비즘적 혁명의 씨앗을 앞서 뿌린 사람이었다.

임두빈(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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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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