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보 효과 : 외치의 무릎
플라시보 효과 : 외치의 무릎
  • 서민(의예) 교수
  • 승인 2018.03.07 01:05
  • 호수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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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메디컬 히스토리 1

“왜 오셨나요?” 의사의 말에 ‘외치’는 오른쪽 무릎이 아프다고 답했다. 외치는 사냥꾼이었다. 하루 열댓 시간씩 걸어서 먹을 만한 동물을 찾았다. 물론 그 동물을 잡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어서, 그 와중에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정강이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외치는 숙소에 누워 요양했다. 부러진 뼈는 붙었고, 외치는 다시 사냥을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외치는 무릎도 곧 나으려니 했지만,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할 수 없이 외치는 용하다고 소문이 난 의사를 찾기로 했다. 산기슭 어딘가에 머문다는데 며칠씩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했다. 외치 역시 두 번이나 허탕을 쳤지만, 세 번째로 갔을 때 드디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소문이 난 사람이어서 그런지 의사는 대충 봐도 영험해 보였다. 그가 무릎을 만지자 외치는 급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고칠 수 있나요?” 외치가 물었지만, 의사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돌아온 의사의 손에는 검은색 액체와 바늘이 들려 있었다. 의사는 외치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바늘을 찔러 넣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외치는 꾹 참았다. 한 뜸, 또 한 뜸. 무릎에는 어느새 십자가 모양의 문신이 그려졌다. 신기하게도 무릎이 아프던 게 낫는 느낌이었다. ‘역시 찾아오기 잘했다니까.’ 외치는 이왕 온 것, 다른 곳도 치료를 받자고 생각했다. “한결 낫네요. 근데 제가요, 등도 좀 아프고, 팔목과 발목도 아프거든요.” 의사는 잠시 외치를 쏘아보더니 외치 보고 돌아누우라고 했다. 다시 바늘이 몸속으로 들어갔고, 1시간이 흐른 뒤 등 곳곳에 줄무늬 모양의 문신이 만들어졌다. 팔목과 발목에도 같은 문신이 그려졌다. 이제 다시 사냥을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답례할 목적으로 외치는 가지고 온 자루를 열고 말린 멧돼지 고기를 꺼냈다. 의사는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기를 받았다. 뭔가 더 달라고 할까 봐 외치는 잽싸게 진료소를 빠져나왔다.

 

사실 외치의 무릎은 반월판이 손상된 상태였고, 등의 통증은 부러진 갈비뼈가 제대로 봉합되지 못해서 온 것이었다. 또한, 디스크가 마모돼 척추뼈 두 개가 거의 붙다시피 했는지라, 그 사이를 지나는 신경이 시시때때로 눌려 통증을 유발했다. 문신 몇 개 했다고 좋아질 리는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외치는 자신의 통증이 그 치료로 인해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였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여기저기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외치는 그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설령 낫지 않는다 해도 외치에게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5300년 전, 신석기 시대였으니까.

 

▲ 자연현상으로 미라가 된 외치

* 외치는 1991년 알프스 산맥에서 발견된 미라로, 보존이 잘돼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글에 쓴 것처럼 그의 몸 곳곳에 있는 문신은 통증을 줄일 목적으로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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