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지구는 순이를 구할 수 없다」(上)
제 41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지구는 순이를 구할 수 없다」(上)
  • 곽민정(문예창작·4)
  • 승인 2018.03.07 15:12
  • 호수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러분, 오이칼을 아십니까. 요즘도 오이를 도마에 대고 탁.탁.탁.탁. 썰고 계십니까. 피부 미용하겠다고 두껍게 두껍게 썰어서 그걸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렇게 대충 오이를, 흠흠. 그러니까 그 오이를 아직도 낭비하고 있습니까! 오이 썰고 나면 도마도 씻고, 칼도 씻어야 하는데, 그러면 습진은 낫지를 않고 그러면 오이를 얼굴에는 왜 붙입니까! 자, 이 마법의 오이칼! 한번 갖다 대면 쓱 하고 잘라지는 마법의 오이칼을 단돈 3000원! 3000원에 모십니다!
 

순이씨는 옆 칸에서 양손에 오이칼을 들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소리쳤다. 나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창밖의 풍경들과 함께 옆 칸에서 오이칼을 팔고 있는 순이씨를 바라보았다. 지난달엔 휴대용 라디오였는데, 이번에는 오이칼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수요가 높지는 않은 것 같다. 순이씨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중년 여성들과 부단히 눈을 맞추려 했다. 여성들을 공략하는 것은 지하철 외판원으로서는 고난이도의 단계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아마도 순이씨에게 물건을 떼준 사람은 그녀의 장사 기술을 인정하는 장사계의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내 나이 아홉 살. 나는 날마다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지하철을 탔다. 그러면 순이씨는 늘 내 옆 칸에서 물건을 팔았다. 순이씨와 나는 가끔 눈을 마주치기도 했으나 대체로 같은 칸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순이씨가 나에게 접근할 일은 없었다. 한낮의 3호선에는 순이씨의 상품에 흥미를 보이는 노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에서도 할아버지들. 맨날 심심해서 탑골공원에 장기 두러 가면서 순이씨를 딱하게 보는 건지, 아니면 진짜 심심해서 물건을 사보는 것인지, 순이씨의 말에 현혹되어 마누라에게 가져다주면 칭찬이라도 들을 줄 알고 착각을 하며 사는 것인지 생각보다 순이씨는 어떤 물건이든 많이 팔았다.
 

그때였다. 순이씨가 양손에 오이칼을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보안원 한 명이 내가 있는 칸에 등장했고 그는 지하철을 둘러보며 순이씨가 있는 칸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을 보니 융통성이 없어 보이고 순이씨에게 동정심을 느낄 캐릭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위험하다. 나는 빠르게 지하철 문손잡이를 돌려 열고는 순이씨가 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아, 이거 마트에도 유통되는 건데, 여기서만 특별히... 어? 나는 순이씨와 눈을 맞추고는 재빨리 노약자석 앞에 섰다. 내 앞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순이씨에게 손을 들며 삼천원을 덜렁거렸지만 이미 내 신호를 알아챈 순이씨는 빠르게 카트를 끌고 다음 칸으로 향했다. 이번 역은, 독립문. 독립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저기요! 아주머니!
 

큰일났다.
 

독립문에서 내리지 못한 순이씨는 보안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이미 두 정거장이나 지나왔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지만 대체로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를 하거나 정의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순이씨처럼, 그리고 나처럼 각자의 삶에 충실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던 사람들은 다시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 앞에 앉은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다시 돈을 집어넣고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지루함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실눈을 뜨고 두 사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 여기서 진짜 아무것도 안했다니까요!
 

그럼 이건 뭔데요, 아줌마!
 

…이건 동대문에 갖다 주려는 거였어요.
 

아니, 아주머니 저 신고 받고 출동한 거예요. 저도 아주머니 사정 봐드리고 싶지만 어쨌든 이건 불법이고, 누군가 신고를 했으니까 저는 어쩔 수 없어요. 물건 압수만 하고 봐드릴게요. 아주머니.
 

보안원 아저씨는 당당했다. 그는 합법적으로 순이씨 소유의 물건을 압수하는 것이었고, 순이씨는 불법적으로 판매를 하는 것이었으니 당당할 수 없었다. 순이씨는 고개를 숙였으나 카트만큼은 절대로 뺏길 수 없다는 심산으로 손잡이를 쥔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물건을 뺏길 것이 뻔했다. 어쨌든 보안원의 체력은 순이씨보다 몇 배는 셀 것이니까, 나라에서 인정받는 보안원이 순이씨의 물건을 뺏는 것을 저항할 수 있을만한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 역은 연신내, 연신내…
 

그럼 저 애한테 물어봐요. 내가 장사했는지 안했는지. 억울해 죽겠네. 지금 아저씨가 나한테 이러는 사이에 진짜 물건 판 사람은 벌써 소식 듣고 줄행랑쳤겠다! 아저씨, 아저씨가 내가 여기서 장사하는 거 봤어요?
 

순이씨의 눈빛이 살아났다. 순이씨는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열차 안의 사람들 모두 나를 주목했다. 나는 내 앞에서 눈을 다시 감는 할아버지를 잠깐 보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보안원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어쩐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요, 그럽시다! 보안원은 순이씨에게 날카롭게 소리치고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내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얘, 솔직하게 말하면 아저씨가 사탕 줄게. 보안원은 가슴께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고는 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자, 저 아줌마가 방금 저 물건 팔고 있었지? 그렇지? 보안원은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야. 보통 내 또래의 아이들은 사탕에 정신이 팔리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나름의 신념에 사로잡혀 있겠지만 나는 달랐다. 순이씨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이로서의 동심을 버리고, 하루빨리 속세에 찌든 어른의 눈빛을 가져야 했다.
 

아니요. 안 팔았는데요.
 

누군가 박수를 짝, 하고 치다 말았고, 보안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나이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 순이씨는 더 이상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모녀에게 나라에서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도, 순이씨가 업체로부터 물건을 떼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순이씨가 더 이상 이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 나는 순이씨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것을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지하철에서 불법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 종류의 사람들 모두 반은 죽상인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곤 했으니까. 순이씨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싫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직장을 구하고, 순이씨로부터 더 이상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순이씨가 더 이상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부끄럼도 없이 물건을 파는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싫었기 때문. 순이씨가 싫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는 그런 이유였다. 순이씨가 옆 칸에서 물건을 파는 동안, 나는 보안원을 비롯한 수상한 낌새를 먼저 눈치 채고 망을 보는 역할을 했다. 정확히 순이씨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인 아홉 살부터, 중학교 2학년이었던 열다섯 살까지. 나는 순이씨의 보조로서 사명을 다해야 했다. 나는 그것이 순이씨로부터 생활비를 버는 나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밥값을 해야 하는 것. 순이씨는 늘 나에게 무엇이든 베풀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밥값이라는 걸 해야 하고, 그것이 작든 크든 뭐든 해야 한다. 그러니까 너는 오늘 나에게 밥을 받았으니 내일도 나랑 일을 하러 가야 한다. 순이씨의 생각에 대해 나는 매번 동의를 했고, 나는 정말로 창피해서 하기 싫었던 일을 해왔다.
 

집 근처 역을 지나갈 때면 나는 혹시나 친구들로부터 이런 내 역할을 들키게 될까봐 매번 마음을 졸였고, 친구들에게는 논술 학원을 다닌다며 거짓말을 했다. 우습게도, 나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을 길게 쓰는 행위였고,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더라도 길게 쓰다 보니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게 보였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논술학원을 다니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는 것을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웅을 받으며 ‘좀 잘 사는 애’로 보여지곤 했다. 순이씨는 나에게 늘 무언가를 해주며 덧붙이는 잔소리가 많았지만 입는 옷부터 매는 가방, 그리고 양말 한 켤레까지 최상은 아니더라도 항상 좋은 것을 사주었고, 부모님 직업란에는 거짓말 좀 쳐도 괜찮다며 ‘영업직’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항목에 자신의 직업군을 포함시켰으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순이씨의 우연인지 계략인지 덕분에 나는 외적으로 보여지는 경제적·외모적 차별을 적절히 피해 가며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순이씨는 그런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오래도록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김치통을 만드는 작은 플라스틱 제조업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경리라지만 사실은 사무보조. 내 책상에는 칸막이 하나 제대로 비치되어 있지 않았고, 사장님을 찾는 전화가 오면 사장님을 바꿔주는 역할, 제품 하자에 대하여 따지는 고객이 있으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영문도 모른 채 사과를 반복하는 역할. 커피를 타오라고 하면 커피를 타오고, 요 앞에 편의점에서 주스를 사오라고 하면 주스를 사 오는 역할, 하루 종일 문서를 복사하고, 엑셀을 켜서 숫자를 기입하는, 그런 역할을 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이지만 사실상 8시에서 9시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고, 야근수당은 당연히 받을 수 없었으며, 그렇게 일을 하고도 4대 보험을 비롯한 각종 세금을 떼고 나면 한 달에 버는 돈은 130만원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것이 큰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졸인 내 학력치고는 꽤 고상한 직업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새벽 우유배달, 지하철 외판원, 심야 시간 마트 점원으로 일했던 순이씨보다는 내가 훨씬 배운 사람이며 나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젊은 시절 순이씨처럼 일을 고되게 하지 않더라도 순이씨가 벌던 돈의 반 정도를 버는 나였으니까. 건설회사 잡부였던 순이씨의 남편보다도 나은 것이니까. 나는 좀 운이 좋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친구들도 나처럼 취직을 했다. 친구들 중 집에서 돈이 좀 있는 애는 전문대라도 대학을 가는 편이었지만 나는 굳이 내가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하고 싶은 것이 없었고, 무엇을 치열하게 하지 않더라도 순이씨처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대학을 가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나와 어울려 놀던 친구들도 대부분 대학을 가지 않았고, 우리들 사이에선 그런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담임선생님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엘리트로 불리던 공부 잘 하는 애들, 그리고 우리와 놀지 않고 부모님들로부터 과잉보호 속에서 성장해온 아이들만이 우리를 좀 무시하는 투로 대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능력이 없다면 하루빨리 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버는 쪽이, 먹고 사는 것에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공부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학교를 이렇게 다닐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순이씨도 내 의견에 동의를 했다. 어떤 아이들의 부모님처럼 못 배워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삼겹살을 세근이나 사 오며 김치찌개도 해 먹고, 구워주기도 하는 등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제야 시장에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내 딸자식이 어디 어디에 취직을 했다며 소문을 냈고, 시장 사람들 모두 순이씨네 딸은 효녀네 어쩌네 하며 입을 모았다. 그러나 순이씨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순이씨가 그 일을 제일 싫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이씨는 사실 그 일을 즐겼다. 순이씨가 나를 일찍 낳지만 않았다면, 나를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돌보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은 영업계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터였다.
 

조금 더 평범하고 무난한 일을 해, 엄마. 그러니까 못해도 생활비를 조금은 보탤 수 있다는 내 말에 순이씨는 정말로 자신이 그 일이 재밌어서 하고 있다는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오히려 죽어 있는 사람을 자꾸만 쳐다 봐주니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흥이 난다고 순이씨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였는지 순이씨는 내가 직장을 구하고도 9년이나 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았다. 카트를 끌며 달리는 3호선 열차에서도 팔았고, 종로3가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하는 지점에서도 은색 돗자리를 펴고 앉아 팔았다. 그것이 손톱깎이 세트가 되기도 했고, 공장에서 떼온 하자가 있는 동전지갑이나 필통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떡 같은 식품류이기도 했다. 대신에 새벽 시간 우유배달을 그만두고, 여전히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았다. 더 이상 망을 봐주는 어린 내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보안원을 피해야한다는 두려움을 안고 카트를 끌었다.
 

가끔은 그녀가 나의 인생을 질투하는 마음에서 내 마음 한 켠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라고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꾸 본인은 저가 좋아서 한다고 했는데, 나는 순이씨가 솔직히 창피했다. 혹여 직장동료들 중 한 명이 순이씨를 발견하면, 그것도 나와 함께 있는데 순이씨를 발견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9년이나 다닌 회사에는 사장님과 그 아래 직원이 4명 있었고, 그리고 각종 사무보조를 담당하는 나까지 총 6명이 있었다. 사장님은 출퇴근을 자유롭게 했으며 사람들만 만나러 다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회사를 설립하게 된 건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고, 그 아래 남자 직원 3명과 여직원 1명은 모두 기혼자였으며 서울 사람이라면 알만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다만 마케팅이나 영업 분야에서 어떤 독특한 아이디어를 낸다거나, 영어로 된 문서를 읽을 때 나보다 더 존중을 받았다.

<1438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