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혈 : 외치, 갈레노스를 만나다
사혈 : 외치, 갈레노스를 만나다
  • 서민 (의예)교수
  • 승인 2018.03.13 17:45
  • 호수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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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메디컬 히스토리 2
▲ Galenus의 초상화

5천 년 전 알프스산에서 ‘외치’가 죽어갈 때, 갑자기 우주선이 한 척 나타났다.


“자네를 쭉 지켜보고 있었네.” 우주선에서 내린 낙지 모양의 생명체는 외치의 어깨에 낙지발 하나를 얹었다. “자네가 지금 죽는 건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죽어가는 와중에도 외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발목이 아프다고 문신을 새기다니, 그런 정신 나간 일이 어디 있나? 외계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자네를 5천 년 후로 보내주겠네.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학도 제법 발달했고, 자네도 괜찮은 의사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해서 외치는 서기 180년의 로마로 가게 됐다. 무릎과 발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그래도 이 시대라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입고 다니는 옷부터 차원이 다르잖아! 아마 의술도 엄청나게 발전했을 거야.”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용한 의사를 물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갈레노스 (Claudius Galenus)를 추천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갈레노스를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외치가 갖고 있던 돌도끼와 화살이 ‘앤티크’라며 고가에 팔린 덕분에, 그리고 그 시절에도 뇌물이 효과를 발휘했던 덕분에, 외치는 드디어 갈레노스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 어디가 아파서 왔지?” 갈레노스가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외치는 무릎과 발목, 그리고 등이 아프다고 했다. 갈레노스는 말했다. “내 스승인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이렇게 4가지의 체액이 존재하네. 이것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할 수 있지. 다시 말하면 자네는 이 체액들 간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아픈 것일세.” 외치는, 체액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아무튼 고쳐달라고 얘기했다. “자네가 날 찾아온 건 행운이야.” 외치의 절규에 무관하게 갈레노스의 말은 계속됐다. “지금 의사들은 너무 무식하다네. 해부학이라곤 도대체 모르지. 난 말이야, 닭, 돼지, 소 등 많은 동물을 해부하면서 인체구조를 익혔거든.”
 

언제쯤 치료가 시작될까 싶었는데, 갑자기 갈레노스가 외치의 팔에 튜브를 박더니 피를 빼내기 시작했다. 외치가 놀라며 저항하려 하자 옆에 있던 조수들이 외치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지금 체액의 균형을 맞추고 있으니까.” 갈레노스는 이 치료법을 ‘사혈’이라고 했다. “여성에게 병이 적은 이유가 뭔지 아나? 생리를 통해 저절로 사혈을 하기 때문이야.” 안 그래도 죽기 직전의 출혈로 피가 모자랐는데 피를 더 뽑히다니. 외치는 점점 몸의 힘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외치는 갈레노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 이래도 나아지는 게 없는구만. 안 되겠어. 다른 쪽 팔에도 튜브를 삽입해. 피를 더 빼면 좋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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