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를 만나다 -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변화
세운상가를 만나다 -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변화
  • 김민제·이병찬 기자
  • 승인 2018.03.20 17:52
  • 호수 14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세운상가 외부 전경

 

Prologue

기술 장인의 오랜 보금자리이자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무엇이든 설계도만 가져다주면 잠수함도, 탱크도 만들어 준다는 그곳을 아는가. ‘세상의 기운이 모인다’는 뜻의 세운상가는 1968년 첫걸음을 내디딘 후 한때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중심지로 활황을 누렸다. 국내 벤처기업 1세대인 TG삼보컴퓨터와 한글과 컴퓨터, 코맥스가 첫 터전을 마련한 장소도 이곳이다.잘 나가던 세운상가는 전기, 전자 업종이 도심부적격 업종으로 지정된 이후 급격한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도심의 흉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철거까지 공론화되는 등 막막했던 과거도 있었다. 철거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80년대 초반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한 아픔의 역사는 고스란히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과거 상권을 이끌었던 젊은 창업가와 기술자의 머리는 어느새 백발이 성성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운상가에는 노련한 장인과 기술자, 전자제품의 계보를 줄줄이 꿰는 상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세상의 기운을 모이게 하자’라는 뜻의 ‘다시세운프로젝트’ 팹랩 서울과 같은 4차 산업혁명에 어울리는 새로운 움직임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새로움과 오래된 것의 조화로 다시금 도약하고자 하는 그곳, 세운상가를 찾았다.

 

세운상가를 다시 세우다

이른 아침, 종로3가역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니 현대적으로 정돈된 세운상가 건물과 함께 다시세운광장이라는 이름의 탁 트인 경사로가 보인다. 원래는 2009년 현대상가의 철거를 시작으로 세운상가와 주변 블록을 모두 허물어 고층의 오피스 건물을 짓고, 세운상가 부지에는 종묘와 남산을 잇는 대규모 녹지 축을 조성하려는 사업이 계획돼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청의 종묘 주변 건물 층수 제한요구 등으로 계획이 무산돼 리모델링을 통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다시세운프로젝트’. 다시 걷는 세운, 다시 찾은 세운, 다시 웃는 세운이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2015년부터 착수한 본 프로젝트는 현재 2, 3층의 공중보행로를 통해 종로와 세운상가, 청계·대림상가를 잇는 1단계 사업을 마치고 삼풍상가에서 남산순환로를 잇는 2단계 사업을 계획 중에 있다.

 

창작에 의한, 창작을 위한 공간, 팹랩 서울

 

▲ 팹랩 서울 내부 전경

50년의 세월이 쌓인 계단을 밟아가며 5층에 올라서니 이전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상점가인 1층부터 4층까지와는 달리 5층부터는 주거공간이기 때문에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가 감돈다. 통로를 따라 구석으로 들어가니 한쪽 벽면에 팹랩 서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팹랩 서울은 2013년 4월 1일에 개소한 국내 최초의 팹랩으로, 서울 이외에도 수원, 대전, 제주 등지에도 팹랩이 운영되고 있다. 팹랩 (Fab Lab)은 제작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3D 프린터, CNC 등 일반인이 구비하기 어려운 디지털 제작 장비를 공유해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서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메이커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 3D 프린터로 만든 조형물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도구와 처음 보는 장비들이 늘어서 있다. 그야말로 작업실이라는 이미지에 충실한 공간이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아티스트나 메이커들이 이용할 뿐이었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도 3D 프린터 사용법을 배우러 와요. 최근 몇 달 사이에는 가정주부나 나이 드신 연장자분도 예전 경력을 살리려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졌고요.” 팹랩 서울의 매니저 남진혁(27) 씨는 최근 팹랩을 이용하는 사용자층과 그 연령대가 다양해졌음을 강조한다.

그는 메이커 학교를 통해 이론 중심이 아닌 실질적인 만들기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는 도서관처럼 팹랩과 같은 공간이 지역마다 들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두 눈이 반짝인다.

 

세운 속의 사람들, 아직 변하지못한 그들

늦은 오후, 1층에서 잠시 상가를 둘러보다가 만나게 된 도건우(32) 씨. 막 음향장비를 보고 나온 그는 스튜디오를 차려서 그곳에 들여놓을 장비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처음엔 낙원상가에 갔다가 이곳이 싸다고 해서 와봤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딱히 싸다고는 못 느끼겠네요”라며 실소하는 그의 대답에 한때 전자상가의 메카였다는 세운상가의 명성이 무색해진다.

같은 층에서 음향장비를 판매하는 하성기(65) 씨는 38년간 세운상가에서 음향장비를 다루고 있다. “요즘에 손님이라고 할 만한 손님은 대여섯 명밖엔 없어. 서울시에서 재생사업을 한다고 바꾼 건 저기 가게마다 붙어있는 조그만 간판 말고는 없는 것 같아.” 세운상가를 살리려는 프로젝트에 정작 일반 상인들은 편승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그. “요즘 느끼는 건 세운상가가 바뀌려면 여기 상인들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건데, 아직 그게 안 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세운상가 3층에서 LED 가게를 운영하는 김옥자(65) 씨는 요새 장사가 안돼 한숨이 깊어진다. “집주인은 주인대로 뭐가 바뀌었다고 하면서 임대료를 올리는데, 사실상 나아진 건 못 느끼겠어. 한창 공사할 때는 공사한다고 손님이 끊기더니 막상 공사가 끝나고 나서도 크게 좋아진 건 모르겠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씁쓸하게 다가온다.

 

세운 속의 사람들, 장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무거워진 마음을 뒤로하고 상가 외벽 한 켠에 있는 작업실로 발걸음을 서둘러 옮긴다. 세운상가 내에 지정된 16명의 장인 중 한 명인 차광수(61) 장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37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는 그는 “이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거죠. 처음에는 수리 일을 주로 했는데 계속해서 제품을 고치고 개선하는 작업을 맡다 보니 아예 물건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발명도 하게 된 거예요”라며 일에 대한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세운상가 내의 워크숍이나 손끝기술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내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기회가 있다는 게 좋죠.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걸 만들어서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고요”라고 말했다.

▲ 업무를 보는 나호선 장인

“다른 장인도 만나볼래요? 나랑 아는 사람이 있는데.” 또 다른 장인을 소개해주겠다며 차 장인이 이끈 곳은 7층의 한 작업실. 포근한 분위기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나호선(61) 장인이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손님도 왔으니까 음악 좀 틀까?” 작업실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는 순간 스피커에서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세운상가에서 일한 지 20년 정도 됐다는 그. “제가 처음 일할 때까지만 해도 장사할 만한 정도는 됐죠. 확실히 지금보다는 유동인구도 많았고요”라며 회상하던 나 장인은 “다시세운프로젝트로 외견은 확실히 좋아졌죠. 하지만 그걸로 세운상가를 찾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연결될지는 의문이에요”라고 말한다. “어찌 됐든 세운상가는 저희 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세운상가에는 항상 원하는 물건을 접할 수 있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 물건을 수리하고,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이 좋거든요. 그렇게 보면 이곳이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같아요.” 세운상가에 대한 감상을 드러내는 나 장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게 다가온다.

 

Epilogue

오후 6시 어느새 어둠이 내려온 세운상가에 하나둘 켜지는 조명이 세운상가를 가득 채운다. 늦은 시간까지 골몰히 수리에 임하는 장인, 만족에 찬 얼굴로 물건을 가져가는 손님, 상가 한편에서 치열했던 업무를 끝내고 주린 배를 채우는 엔지니어까지, 세운상가의 태엽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만 같다.

재생된 미래, 다시세운프로젝트와 변화해보려는 상인들의 열망으로, 쇠락한 세운상가가 도시의 흉물이 아닌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갈피를 못 잡은 채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외관만 바뀌고 알맹이는 시대 흐름에 맞추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세운의 변화는 아직 멈추지 않는다.

김민제·이병찬 기자
김민제·이병찬 기자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