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에 걸린 외치
흑사병에 걸린 외치
  • 서민(의예) 교수
  • 승인 2018.03.28 14:22
  • 호수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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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메디컬 히스토리 4
▲림프절이 부은 모습

“으악!” 외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또다시 살아났다. 부활의 기적은 처음엔 신기했지만 반복되니까 이제 그러려니 했다. 다만 궁금한 건 여기가 도대체 몇 년도인가, 였다. 손등에 쓰여 있는 숫자는 1348년,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강연을 들은 때보다 200년 더 앞으로 왔다. 무릎은 여전히 아팠지만, 외치는 이 시대에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뭔가 쫓기는 것 같아서 외치도 그들 틈에 섞여 달리기 시작했다.

 

“근데 지금 왜 달리는 겁니까? 지진이라도 났나요? 아니면 산짐승들이 떼로 덤비나요?”

잠시 쉬는 동안 외치가 또래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사람 참 한가한 얘기를 하네. 지진이나 산짐승 따위는 일도 아닙니다. 지금 흑사병이 돌고 있다고요. 우린 그 병을 피해서 도망치고 있는 거고요.”

흑사병이 뭐냐고 묻자 남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열이 나고 관절 여기저기가 다 쑤시다가 결국 몸이 까맣게 돼서 죽는 병입니다.”
 

남자의 말을 듣던 외치는 깜짝 놀랐다. 관절이 아프다니, 그럼 내가 무릎이 아픈 것도 흑사병일까? 외치는 호기심이 일어 사건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현장은 끔찍했다. 수많은 시체가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었다. 도시에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했고, 움직이는 거라곤 쥐들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무릎이 아픈 건 흑사병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외치는 도시를 빠져나와 아까 그 남자가 가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몸에 벼룩이 붙었는지, 몸 이곳저곳이 가려웠다. “여긴 참 먹을 게 많구나.” 사람들이 급히 떠나느라 어느 집에 가도 먹을 게 많았다. 어쩌면 집주인이 죽어서 빈집이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집 저집을 다니며 사흘을 보내던 중 외치는 몸에 열이 나고 관절 여기저기가 쑤셨다. 외치가 고치려고 했던 관절통과는 차원이 다른 통증이었다. 가랑이 근처의 림프절이 커졌을 때가 돼서야 외치는 그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흑.사.병. 증상은 점점 심해져, 몸의 여러 부위에 출혈이 있기까지 했다. 남의 집 침대에 누운 채 외치는 낮게 중얼거렸다. “흑사병, 다시는 걸리고 싶지 않아! 너무 괴롭다고.”
 

14세기 중엽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거의 1억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페스트균이 원인인데, 쥐의 몸에 기생하던 벼룩이 사람에게 세균을 옮긴다. 흑사병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이다. 그 이전까지는 의학이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대신 천주교 사제들이 신앙의 힘으로 병을 고치려고 했는데, 흑사병 사태 이후 사제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게 흑사병은 제대로 된 의학이 태동하는 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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