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에 대한 주류의 오만
비주류에 대한 주류의 오만
  • 이도형 기자
  • 승인 2018.09.19 13:12
  • 호수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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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70만 년 전, 인류는 주먹도끼와 같은 도구를 통해 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동물을 수단으로서 이용해왔다. 배가 고플 때는 식량으로, 추운 날씨에는 의류로, 제품 개발을 위한 실험 재료로, 재미를 위해 싸움을 붙여 눈요깃거리로 이용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이기심에 비롯된 행위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한 동물과 자연 보호를 넘어 동물 자체의 권익을 주장하며 비건(완전 채식)을 주장한다.

기자는 본지 12면 취재를 통해 동물권과 비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며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시선은 한없이 차갑다. 그들을 향해 사람들은 “우리가 말 못하는 짐승의 권리까지 챙겨야 하냐”며 비아냥거리고, 채식주의자들에게는 “유난을 떤다”며 조롱한다.


만약 동물권과 비건이 우리 사회의 주류 문화였다면, 인식이 지금과 같았을까. 오늘날 사회는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편적인 가치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비주류로 간주되고,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다양성 추구 원리에 따르면 주류와 비주류 모두 평등하고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주류는 마치 관용을 베풀 듯 비주류를 수용해준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 동물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한 동물권 활동가는 “나는 ‘이해’라는 단어가 싫다”고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은 나보다 그 사람이 위인 위치에서 받아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기자는 이해라는 단어가 그에게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해석된 이유는 주류의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넓은 아량으로 비주류도 ‘인정’해준다는 모습은 주류의 우월함을 뽐내는 것처럼 보인다.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격은 어디서 나온 걸까. 본인이 사회의 주류라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판단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 한 사람의 가치관 혹은 살아가는 방식은 개인이 용인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다수라는 상황은 소수를 판단하는 특권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다수가 무조건 정답이라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다수가 무조건 옳다는 사회적 통념에 맞선 작품,『민중의 적』의 작가 헨리 입센은 “상충하는 가치에 대한 양자 선택에서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대중의 판단에 의해 소수의 의견이 희생되지 않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주류인 그들은 다수로부터 존중을 바랄 뿐, 본인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오히려 우리야말로 다수라는 방패로 눈과 귀를 막아버린 비정상이 아닐까. 주류와 비주류 문화 모두 존중받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이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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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oshape@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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