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와 의학
유전자와 의학
  • 서민(의예) 교수
  • 승인 2018.11.28 10:57
  • 호수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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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의학의 미래
▲ 게놈정보를 활용해 완치된 니콜라스 볼커
▲ 게놈정보를 활용해 완치된 니콜라스 볼커

 

니콜라스 볼커 (Nicholas Volker)라는 아이가 있었다. 두 번의 유산 끝에 낳은 귀한 자식이었다. 세 살이 됐을 때, 볼커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는 볼커의 배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했다. 대변으로 나와야 할 것들이 그 구멍으로 새 나왔다. “이런 질환은 처음 봅니다.” 의사들은 그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고, 그 와중에 볼커의 장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그런데도 증상은 계속됐다. 볼커는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그동안 100번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세균에 감염돼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문제는 어느 의사도 볼커의 병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에서 그를 구한 이는 밀워키에 사는 제이콥 (Howard Jacob)이란 의사였다. 그 의사는 볼커의 게놈정보, 그러니까 DNA 염기서열을 해독해 봤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XIAP이라는 면역을 담당하는 유전자에 치명적인 돌연변이가 있었다. 이는 볼커의 장에 상시적인 염증이 일어났던 이유였다.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 볼커는 제대혈에서 얻은 세포를 골수에 이식받았다. 이식의 결과 볼커는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했고, 지금은 그 나이 또래 아이들처럼 뛰놀 수 있게 됐다. 볼커의 사례는 “이걸 어디다 쓰나?”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게놈프로젝트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볼커보다 좀 더 알려진 사례가 바로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다. 그녀는 유방암을 걱정해 멀쩡한 가슴을 수술했다. 이게 괜한 걱정만은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56세에 난소암으로 죽었다. 유전학의 발달로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가 암에 걸린 것은 BRCA1과 BRCA2 유전자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유전자는 유방이나 난소세포에 이상이 생기면 고치는 역할을 담당하며, 그럼으로써 암을 억제한다. 그런데 이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유방암과 난소암의 발병빈도가 60~80% 올라간다. 45세에 죽은 외할머니도 난소암이 사인이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졸리에게도 이 유전자의 변이가 발견됐다. 그녀가 유방절제와 더불어 난소와 나팔관을 제거하는 수술을 연달아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게 꼭 돈 많은 졸리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최초로 인간게놈정보를 해독하는 데는 13년의 세월과 3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지만, 지금은 100만 원 정도만 내면 누구나 한 시간 안에 자신의 유전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 결과 개인맞춤형 의료가 가능해졌다. 우유가 누군가에게는 설사를 유발하는 것처럼, 사람이란 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듣는 치료약이 다른 이에게 듣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A라는 병에 B라는 약을 썼을 때 80%의 환자에서 효과를 봤다고 해보자. 약에 듣지 않는 20%는 의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이 안 듣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이 환자에 B라는 약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를 유전자 검사를 통해 미리 알아낼 수가 있다. 또한 유전적으로 다른 20%를 위한 약도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 과거 이제마라는 분은 사상의학이란 체계를 만들었다. 소음인, 소양인, 태양인, 태음인 등 사람을 체질에 따라 나누고 그에 맞는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유전학의 발달로 인해 그가 주장한 체질의 중요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매우 느리지만 의학은 이렇듯 발전한다. 하지만 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닐 터, 건강해지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 의학을 믿고 막살기보단, 운동도 하고 술담배도 적당히 하는 등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자.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아프면 개고생인 건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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