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통계청이 정식으로 출생아수 집계를 시작한 게 1970년이었다. 그해의 출생아수는 일백만을 살짝 넘겨 100만6천645명이었다. 다음 해인 1971년은 102만 명을 넘었다. 이 해의 합계출산율(여자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 수)은 4.54명이었다. 참고로 작년 2018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최초로 1명 아래로 떨어졌다.
출생아 수와 관련하여 기록할 만한 연도들이 있다. 먼저 세계은행 추산으로 출생아 수 90만을 최초로 돌파한 1955년이 있다. 1947년부터 70만 명에 가까웠던 출생아 수가 1950년 전쟁 발발의 여파로 63만 명대로 떨어졌으나, 다음 해부터는 놀랍게도 전쟁 중이었음에도 1954년 까지 계속 4~5만 명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1955년에는 전역병들이 ‘고향 앞으로’ 가서 가정을 이룬 효과에 사회도 안정 기조로 접어들면서 7만 명 가까이 출생아 수가 증가하며, 한국 베이비부머의 원년이 되었다.
전쟁 이후 신생아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베이비부머’라는 용어 자체가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대 미국의 출생아수는 평균 250만이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했으나 전시 호황으로 경제가 회복되면서 출생아수도 늘었으나 300만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1946년 바로 350만을 돌파하고, 이후 1964년까지 연평균 신생아 수는 400만에 가까운 394만 명을 기록한다. 이후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는 350만 명 이하로 떨어진다. 베이비부머들이 자녀들을 낳는 1977년에서 1993년 동안에 다시 신생아 수가 증가해서 연평균 373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는 ‘단카이(塊)세대’라는 말이 있다. ‘단카이’는 덩어리라는 뜻으로, 뭉쳐서 돌출할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 좁게 보면 1947~1949년 사이에 출생한 이들을 이른다. 전쟁으로 100만 명대로 떨어졌던 출생아수가 이 기간에는 300만 명 가까이 치솟았다. 조금 넓게 보면 단카이세대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가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출산 붐이 일었던 1940년대 초반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 호황이 일었던 1953년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미국과 비슷하게 일본에서도 1970년대 단카이세대가 자녀를 낳기 시작하면서 2차 베이비붐이라는 시기가 오는 것 같았으나, 석유 가격이 치솟은 ‘오일 쇼크’ 여파로 경제 성장이 꺾이면서 출산율이 떨어졌다.
한국에는 미국의 에코붐은 고사하고 일본에서와 같은 짧은 기간이라도 베이비부머들의 출산으로 출생아수가 늘어나는 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베이비붐을 꺾고, 2차 붐까지 막은 제1의 요인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출생아수가 느는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펴는데, 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표어가 있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1970년대의 가족정책에서 하나도 낳지 말라는 식으로까지 간 것이었다. 그 여파가 지금의 30만 명대 출생아수를 기록하는 현재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베이비부머는 이제 노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소위 실버산업의 주역으로 각광받고 있다. 어느 세대보다 큰 구매력을 가지고 은퇴한 세대인 것이다. 물론 양극화는 이 세대의 경제력에서도 나타난다. 세계 최고의 노인빈곤률을 보이는 한국에서는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전쟁 후의 평화와 경제 발전의 상징과 주역이었던 베이비부머 세대에 갈수록 어두운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
박재항 마케팅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