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라, 갑자생’과 ‘위대한 세대’
‘묻지마라, 갑자생’과 ‘위대한 세대’
  • 박재항 마케팅 컨설턴트
  • 승인 2019.05.23 00:33
  • 호수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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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시대에 가려진 그들의 고통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십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십이지를 조합한 육십갑자의 첫째인 ‘갑자(甲子)’년생은 재주가 뛰어나다고 했다. 그런데 ‘묻지마라, 갑자생’이라고 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여기서의 갑자년은 1924년을 말한다. 1944년 일제의 강제 징용과 징병이 대대적으로 행해지면서 당시 만 20세의 갑자생들은 아주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신체검사에서 물어볼 것도 없이 합격시킨다고 해서 ‘묻지마라, 갑자생’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끌려가서 수많은 갑자생들이 희생되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은 이 땅에서 더욱 험한 시간들을 헤쳐 나가야 했다. 좌우의 극심한 대립의 최전선에 있었고, 한국전쟁에서도 징집대상이 되어 총을 들고 싸우며 숱하게 쓰러졌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의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은 모진 고생을 겪은 세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고생한 정도로 자신들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전라도 광주에서 산 이들의 해방 전후 이야기를 담은 책이 2018년 초에 나왔는데, 제목이 『묻지마라, 을해생』이었다. 여기서의 ‘을해’는 1935년이었다. 일제식민지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10대 초반을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그리고 10대 후반은 전쟁에 휩쓸리며 학도병으로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전후의 폐허 속의 세계 최빈국에서 변변한 일자리조차 찾을 수 없는 가운데 20대를 맞이했다. 장기집권 독재정권을 몰아냈다는 4.19 민주혁명의 영광은 그들보다 서너살 이상 어린 세대들에게 돌아갔다. 산업역군으로 경제성장의 선도 역할을 했다는 조명도 그들보다 어린 세대들에게 집중되었다.

맥스 데스포,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1950
▲ 맥스 데스포,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1950

‘묻지마라’를 외친 갑자생과 미국의 비슷한 연배 세대는 당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1998년 미국의 유명 언론인인 톰 브로코(Tom Brokaw)는 대공황을 이겨내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대를 그린 『The Greatest Generation(가장 위대한 세대)』란 책을 냈다. 이 용어가 그대로 세대명으로 자리 잡았다. 넓게는 1901년생부터 1927년생까지 이 세대에 포함시킨다. 1924년, 갑자생은 이 세대의 막내 그룹에 속한다. 세계 평화를 지켜냈다는 승자로서의 위상에 전후 초강대국으로 자리를 굳힌 풍요로운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세대였으니, 그런 세대명이 붙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홀딩 더 라인(Holding the Line)』은 1950년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 정책을 중심으로 다룬 책이다. ‘홀드 더 라인(hold the line)’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리다’, ‘현상을 유지하다’란 뜻을 가진 숙어인데, 여기서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아이젠하워의 미국은 반공노선을 굳건히 하면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며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 어떤 조짐도 막는 것을 정책 기조로 했다. 그렇게 변화를 거부한 정부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으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2차 대전 이후 십대를 맞이한 미국의 1935년, 을해생과 직후 세대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했지만, 윗세대의 그늘에 묻혀버리고 복종을 강요당한 듯한 느낌을 준다. 심지어는 이들 바로 직전 세대부터는 한국전으로 시작하여 제대로 승전을 이룬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로 비하되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광풍과 소련과의 전쟁 위협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Silent Generation(침묵의 세대)’라고 부른다. 강요당한 침묵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저항의 목소리가 나오며 ‘Beat Generation(비트 세대)’가 195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고 비주류였다. 결국은 그들보다 어린 세대인 베이비부머가 록큰롤이나 히피 문화까지 60년대를 열며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 언제나 어느 나라에서나 앞뒤 세대에 눌린 ‘낀 세대’는 존재한다.

 


박재항 마케팅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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