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섬, 스리랑카
깨달음의 섬, 스리랑카
  • 김현우(전자전기공·4)
  • 승인 2019.05.23 00:33
  • 호수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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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처음으로 외국에 발을 디뎌본 것은 2018년 8월 14일, 스리랑카 반다라나 이케 국제공항에서의 일이었다. 무턱대고 떠난 여행이었다면 더 낭만이 넘쳤겠으나 아쉽게도 그럴 배짱은 없었다. 입국 심사관이 나에게 물었다. “방문 목적은?” 나는 대답했다. 봉사(Volunteering)라고. 나는 월드 프렌즈 청년 중기봉사단이었다.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하늘길을 장장 일곱 시간을 날아 도착한 인도양의 보석 스리랑카, 나는 그곳에서 5개월을 살았다.

한국을 떠난 지 2주째인 8월 27일, 대도시 콜롬보에서 안락했던 현지 교육을 마치고 파견기관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2주 동안 스리랑카에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은 콜롬보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콜롬보는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고 모든 간판이 영어로 적혀있었다. 여기는? 간판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 동네에 외국인은 합쳐서 네 명 정도 됐을 것이다. 우리 팀원이 네 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시점에선 정말로 진지하게 앞으로의 의식주 문제를 걱정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져 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모든 문제가 참 쉽게 해결됐다. 집주인 아저씨부터 시작해서 파견기관의 선생님들, 학생들, 이웃집 주민들.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몇 번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전기세와 수도세는 어떻게 내는지, 음식점은 어디에 있는지....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5개월이 아니라 5일 정도 버텼을 것이다. 나는 분명 봉사하러 온 사람이었지만 처음 3주 정도는 사실상 일방적 봉사를 받고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무언가를 주면 그들은 항상 더 큰 것으로 돌려주었다. “해외 봉사를 가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라는 아주 오래되고 자주 쓰이는 표현이 있다. 그 표현이 어떻게 오래 이리 오래 살아남았는가? 나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몸소 뼈저리게 느낀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세상 모든 곳에서 다 다르다. 하지만 그건 껍데기일 뿐이다.

나는 그 껍데기를 바라보느라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은 서로 돕는다는 것.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그 당연한 사실이다. 스리랑카는 나에게 그 사실을 다시 되새겨주었다. 2019년 1월 13일, 스리랑카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는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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