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얼에서 '통일'의 혼으로
'독립'의 얼에서 '통일'의 혼으로
  • 이도형
  • 승인 2019.09.04 14:38
  • 호수 14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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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해외학술탐방
▲ 관동 법원 앞에서 단체 포즈를 취하고 있는 탐방단
▲ 관동 법원 앞에서 단체 포즈를 취하고 있는 탐방단

 

Prologue
지난 7월 10일, 우리 대학 소속 30명의 탐방단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외학술탐방을 떠났다. 백범김구기념관과 우당기념관을 시작으로 대련, 단동, 상해, 중경 등 중국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했다. 8일간 8천km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했던 탐방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치열했던 독립운동 현장을 되짚어보는 대장정이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마주한 역사적 현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기자 역시 그 답을 찾기 위해 여정을 따라나섰다.


# 다시 새긴 학술탐방의 취지
탐방단은 이른 새벽 인천 공항에 모여 중국으로 향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안중근 의사와 애국지사들이 재판받았던 관동법원이었다. 안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만주로 시찰 온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후 여순감옥으로 압송된 뒤 그는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한 채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재판을 받았다. 일본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독립을 외치겠다는 그는 항소도 하지 않은 채 여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여순 감옥은 한 칸당 2천여 명의 포로까지 수감하던 공간이었다. 등불이 없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암방, 등급별로 높이가 다른 밥그릇, 교수형장. 고문과 죽음이 만연했던 공간을 통해 당시의 혹독했던 생활이 느껴졌다. 그러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염원은 감옥의 차가움을 이겨냈다. 결국 선조들은 독립을 쟁취해냈고 포로가 아닌 학생으로 감옥을 방문한 기자와 탐방단이 그 증거였다. 이번 탐방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 독립의 성공을 상기시키는 단초가 된다는 생각에 괜스레 어깨가 무거워졌다.

여정이 끝난 뒤 숙소에 도착한 탐방단은 박성순(교양대학) 교수의 강의를 통해 우리 대학 설립이념인 ‘민족사학’의 의미를 되짚어 봤다. 우리 대학의 설립자인 범정 장형 선생은 국권 피탈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 운동가의 삶을 선택해 전국을 누볐다. 박 교수는 “‘단국’이라는 이름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분단된 우리나라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 한다”며 “우리 후학들이 범정 장형 선생과 선조들의 독립 정신과 통일 정신을 이어받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 한민족의 정기가 담긴 백두산 천지
▲ 한민족의 정기가 담긴 백두산 천지

 

# 압록강과 백두산을 통해 확인한 우리 겨레
단동으로 이동한 탐방단은 압록강 유람선에 올라탔다. 강 건너편으로 북한 땅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인 신의주시가 보였다. 망원경을 통해 살펴본 건물에는 ‘김정은 장군 만세’와 같은 문구와 인공기가 곳곳에 걸려있었다. 미디어가 아닌 두 눈으로 처음 접하는 북한은 낯섦, 그 자체였다. 강을 하나 둔 채 신식 건물로 가득 찬 중국을 보고 있자니 그 간극이 더해졌다. 그러던 중 북한 쪽의 배 위에 서 있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게 됐다. 탐방단은 ‘통일해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반복하며 북한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계속된 피로 누적에도 불구하고 탐방단은 백두산을 간다는 사실에 들떠 보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그재그 커브 길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고도로 인해 점점 먹먹해지는 귀는 천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차에서 내린 후 펼쳐진 탁 트인 자연에 순간 숨을 멈췄다. 이채원(응용통계·4) 씨는 “천지는 잦은 날씨 변화로 일 년에 몇 번밖에 보지 못한다고 하던데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행운이다”라며 “전날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온 보람이 있다”고 기뻐했다.

압록강에 위치한 단교(斷橋)와 백두산은 한민족의 아픔이 담겨 있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에 의해 폭파됐으며, 우리나라 기본 산줄기가 되는 백두산의 백두대간은 중국과 북한이 반절씩 소유하고 있으나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을 통해서야만 백두산을 접할 수 있다. 전병헌(도시계획부동산·3) 씨는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어린아이가 동물원을 접했을 때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하듯이 북한을 바라보게 된 우리의 현실이 참 안타깝다”며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 독립의 발자취를 따라 발견한 선조들의 노력
범정 장형 선생이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운영했던 정미소 터, 윤봉길 의사가 일본 고관에게 폭탄을 던졌던 훙커우 공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가 됐던 상해·중경임시정부청사 등. 8일 동안 여러 독립운동의 현장을 다니며 독립 운동가들이 느꼈던 고통과 투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오늘날 독립 운동가의 발자취는 오랜 암흑기를 거쳐 숭고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영광이 있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오룡배 소학교와 김구 피난처에서 직접 찾을 수 있었다. 장형 선생은 당시 일본의 철저한 검문을 피해 어린 장충식 이사장에게 그의 옷 안감을 뜯어 그 속에 군자금을 운반하게 했다. 당시 장 이사장은 독립운동으로 바쁜 장형 선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며 성과 이름까지 바꾼 채 군자금 조달을 위해 초등학교도 여러 군데 다녔다고 한다. 독립은 독립 운동가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분의 헌신으로 이뤄진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거를 지휘하는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에 일본은 김구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강력한 수색작업을 진행했고 감시를 피해 가흥으로 2년여간의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주택으로 된 2층짜리 건물 중 가장 으슥한 방이 김구 선생의 침실이었다. 침대 밑에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비상 탈출구가 있었다. 밝은 미래를 위해 싸우는 시간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어두웠어야만 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라는 말처럼, 그림자가 있었기에 빛도 존재했다. 그들의 노고에 한없이 감사함을 느꼈다.
 
▲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잊지 말아야 할 우리나라의 정신

여러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여정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탐방단의 마지막 행선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건물이었다. 방문 당시 건물 개장 전으로 출입이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했으나 중경임시정부청사 복원을 총감독했던 박 교수와 인연이 닿아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전시돼있었다. 대부분의 서명이 한자로 쓰여 내용을 완벽히 헤아리지 못했으나 ‘우리에 독립은 단결이다’라는 서명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국광복군의 광복에 대한 기쁨과 완전한 독립 국가에 대한 염원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탐방단의 마지막 일정은 학생팀 김형수 학생처장의 지시에 따라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한목소리로 크게 읽으며 끝났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시작된다. 헌법에서도 공인하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독립정신은 앞으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8일간 인솔을 맡은 최기환(건축공·4) 씨는 “하루에 11시간을 버스로 이동하기도 하고 새벽 2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하는 등 길고 힘든 여정이었으나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며 “앞으로 더 많은 학생이 해외학술탐방을 통해 우리 대학의 창학 이념과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함께하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Epilogue
통일연구원이 5월에 발표한 ‘KINU 통일의식조사 2019' 결과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 비율이 지난해 70.7%에서 올해 65.6%로 하락했다고 한다. 남북이 한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늘어나는 추세다. 선조들이 바라온 독립의 모습은 지금과 같을까.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으나 함께 맞이하지는 못했다. 현재 우리는 통일이라는 목적지 앞에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김구 선생의 명언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걸어간 길은 험하고 어려웠으나 절대 틀리지 않았으며 부끄럽지 않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들이 보여준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이제는 우리가 통일정신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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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oshape@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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