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에는 나이가 없다
독립에는 나이가 없다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09.04 14:10
  • 호수 14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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⓵ 강우규 의사(1855~1920)
▲ 서울역 앞 강우규 동상

서울역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 동상이 있는지도 모르고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한다. 다른 곳에 있는 동상과는 달리 유독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동상 주변에 있는 노숙자에게서 풍기는 악취와 혐오감으로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역 앞에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이하 ‘의사’ 생략)로 가볍게 여길 분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강우규는 형의 도움으로 익힌 한의학으로 자수성가할 수 있었다. 풍족한 부를 가졌던 강우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었지만 늘 타인을 도와주며 살았다.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애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강우규는 감시와 탄압이 적은 국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5년 동안 간도와 연해주를 직접 걸어 다니며 찾아낸 곳이 신흥동이었다. 강우규가 독립운동의 거점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찾아오면서 1년 만에 100여 호가 넘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설가 박경리는 이런 강우규의 모습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토지'에 강우규를 실명으로 등장시켰다.


신흥동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펼치면서 자신도 대한 국민 노인 동맹 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던 강우규는 66세의 나이에 자신이 직접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울역에서 거사 준비를 마친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비록 사이토 총독을 죽이진 못했지만 37명의 사상자가 나오면서 일제는 식민통치에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일제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노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범인을 찾다가 16일이 지나서야 다시 거사를 준비하던 강우규를 체포할 수 있었다. 


체포된 강우규는 한순간도 비굴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재판장에서도 당당한 모습에 일제는 피고라는 용어 대신 강 선생 또는 영감님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존경과 판결은 별개였다. 결국 강우규는 일제에 의해 1920년 11월 29일 66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만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독립을 위한 조그마한 초석이 되기를 원했던 강우규의 바람은 수많은 젊은이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누구보다 젊은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강우규와 그의 유언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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