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3월 13일 술값만 내고 왔다
화경대 - 3월 13일 술값만 내고 왔다
  • 권항주
  • 승인 2004.03.17 00:20
  • 호수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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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화이트데이, 두 친구를 만났다. 한 친구는 사업을 하는 친구이고, 한 친구는 의사였다. 시시콜콜한 세상사를 안주삼아 쐬주잔을 기울이다 자연히 화제가 정치로 옮겨갔다.
사업하는 친구는 때마침 부동산 경기로 ‘돈 좀 만진’ 녀석인데 엄살부터 부렸다.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어. 노무현정권이 부동산으로 재미 보게 놔 두겠어’로 시작해서 ‘보따리 싸야지’로 끝냈다. 사실 그 친구는 누구보다 반 DJ 정서가 강했던 친구인데 결과적으로 부동산경기를 활성화 시킨 DJ정권 덕에 사업을 일군 친구였다.
‘받은 놈들이 더해’. 사업하는 녀석의 말이 끝나자 마자 의사 친구가 일갈하고 나섰다. ‘니들이야말로 정권의 최대 수혜자들 아니냐, 우린 뭐냐. 의약분업 한답시고 완전 노가다로 전락했다’, ‘하루에 환자를 몇명이나 보아야 일당 하는 지 아냐, 족히 이백명은 봐야한다’. 의사 친구 역시 의약분업으로 ‘돈 좀 만진’ 녀석인데 핏대를 세웠다.
좀 끼어들라 쳐도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둘다 정권의 피해자고, 서로가 더 큰 피해자라고 갑론을박 하는 통해 죄 없는 쐬주만 축냈다. 그렇게 밤이 깊어 쐬주집을 나올 때, 말 한마디 못한 필자가 쐬주값을 내고 나왔다.
두 친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깨동무를 하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지난 화이트데이, 우연의 일치인지 또 두친구를 만났다. 의례적으로 그간의 안부를 묻고, 사는 얘기를 하고, 서너순배 쐬주잔이 돌았때 아니나 다를까 화제는 정치판으로 옮겨졌다. 항상 먼저 시작하는 것은 사업하는 녀석이었다.
어제도 신행정수도 후보지 어디에 아파트 분양차 다녀왔다는 녀석은 육두문자까지 써 가며, 그럴줄(탄핵 당할 줄) 알았다고 침을 튀겼다. ‘부동산 경기 다 죽여 놓고 멀쩡 할 줄 알았느냐는 식’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고, 별로 놀랄일도 아니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끝에는 보따리 싸 나가야 겠다로 말을 끝냈다.
그러자 의사 친구가 비죽댔다. 그 말도 안되는 의대 대학원인가 뭔가를 만들어 의사들 다 ‘도매금’으로 넘긴다고 만든다고 난리였다.
그러면서 정치하는 사람들 싹 갈아야 한다고도 했고 자기도 보따리 싸 곧 뜰테니 먼저 가서 터 닦아 놓으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는 둘이 의기투합했다. 둘 모두 우리나라 정치의 피해자이고, 그래서 정치판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동질성의 발로였다.
정치판만 갈아 엎으면 천지가 개벽하여 곧 광명천지가 열릴것 같은 기세였다. 일년전에도 그랬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쇠주 집을 나섰다. 계산은 역시 술자리에서 변죽도 울리지 못한 필자의 몫이었다. 두 친구는 기세 등등하여 또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혼자말이 절로 나왔다. ‘떠난다는 놈들이 갈아 엎기는 뭘 갈아 엎어...’.
차창밖에는 한무리의 촛불시위대들이 불꽃을 태우고, 그 불꽃은 취기에 더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권항주<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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