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벌레 이야기’ 일까
왜 ‘벌레 이야기’ 일까
  • 류승하(마이스터경영·2)
  • 승인 2019.09.25 23:53
  • 호수 14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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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제목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벌레' 이야기일까. 이청준의 이 단편 소설에는 벌레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불쌍한 피해자들과 비겁한 가해자,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종교에게 답을 찾으라는 집사가 한 명 등장할 뿐이다. 유괴와 살인, 그리고 그 정신적인 피해가 사람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처절하고 지독하게 담아낸 이 단편 소설은 흡입력 있으면서도 빠르게 전개된다. 단숨에 읽고 나면 불쾌한 기분과 함께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한다. ‘벌레'는 곤충이나 기생충을 통틀어 지칭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제목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는 흔히 연습 벌레', ‘돈벌레'처럼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벌레'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희망 벌레'도 있지 않을까. 희망에만 집착하는 사람 말이다.

남편의 시점에서 사건의 전개를 보여주고, 아내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아내에게 광적으로 열중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끈질기게 유괴된 일암이를 찾아다녔고, 부처와 하느님에게 빌고 또 빈다. 일암이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에는 복수심에 혈안이 되어 범인을 찾아다녔고, 그 이후에는 일암이의 내세를 위해 다시 신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를 얻었다. ‘용서'라는 단어는 곧 일암이의 영혼의 구원이었으며 신에게 우리 일암이를 잘 부탁한다며 드리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그녀는 은혜와 용서, 구원과 은총을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렸다. 그 끝엔 용서의 증거'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대면하여 용서하는 것, 원망과 복수심을 진정으로 내려놓고 살인자를 용서하여 일암이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천국, 그녀의 아들 일암이를 죽인 당사자가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 구원을 위해서 살인자는 일암이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사형을 기다렸다. 자신이 죽였던 그 아이가 있을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암이 어머니에겐 희망고문 벌레'가 붙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던 그녀는 희망은 부서지고 으깨지다 못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믿음과 구원은 그렇게 희망고문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고, 그녀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희망 벌레는 그녀에게 희망 고문으로 기생하고 있다가 마침내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런 벌레가 근처에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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