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죽음을 아시오
박제가 되어버린 죽음을 아시오
  • 단대신문
  • 승인 2019.09.27 09:50
  • 호수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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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

◇ 얼마 전 미제였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졌다.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해당 사건이 조명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미디어의 힘이 작용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부터 시사 프로그램까지 끊임없이 다뤄진 덕분에 공소시효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수사가 진행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로 조명되는 사건에 이런 긍정적인 측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 사건을 미디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미화하거나 극화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서사를 만든다는 미명하에 가해자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한참 인터넷이 확장될 무렵,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대중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곧 역으로 이용됐다.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풍화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꺼내 볼 수 있는 매체는 온라인뿐이다. 인터넷은 누군가에 대해 잊고 싶지 않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을 기록하는데 가장 좋은 액자였다. 기록은 좀 더 많은 이에게 전달되기 위해 요약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뉴스가 대화체로, 대화체가 만화로. 실화를 미디어로 구현하는 일이 점점 쉬워져 갔다.

◇ 미디어로 회고된다는 것은 곧 잊힐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조명되길 원치 않던 죽음도 타의에 의해 영원히 인터넷을 떠돈다. 상황이 또다시 역전됐다. 많은 이들은 기록을 스포츠로 즐기기 시작했다. 첫 기록에 담긴 사실을 무시하고 오독하는 일은 재미로 취급됐다. 인터넷상에 ‘박제’되는 행위는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악의만 가득한 범죄 사건이 누군가의 선망을 얻는 영웅담으로 남고,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아둔한 조연1로 소비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 1바이트(byte)의 무게가 인간의 존엄성보다 가벼운 나머지, 인터넷의 바다는 존엄성을 침수시키고 미디어만 표류시켰다. 정보 값으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존재는 자의를 잃은 지 오래였다. 실화로 만들어진 미디어가 제 의도를 다 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죽음을 박제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그리움을 카타르시스로, 비극을 즐거움으로 소화하는 세대를 끝내야 할 필요가 있다. <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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