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청년은 모두 유관순이다
이 땅의 청년은 모두 유관순이다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10.22 16:42
  • 호수 14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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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유관순(1902~1920)
▲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한 유관순 동상
▲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한 유관순 동상

2017년 『유관순은 허구 인물이다』라는 책이 나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동참하며 유관순 열사(이하 열사는 생략)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소식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해야 했다. 물론 유관순이 허구 인물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전부를 모욕하는 일이다.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관순은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학교에서의 유관순은 또래들과 장난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중 3·1만세시위가 시작되자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고 덕수궁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한 뒤, 시위대에 합류했다. 일제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만날 공간을 없애면, 곧 잠잠해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휴교령은 오히려 학생들이 고향에 내려가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몰래 숨겨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도 아버지와 함께 4월 1일 아우네 장터에 모인 3천여 명과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하나의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겁에 질렸다. 일제는 불안감에 현장에서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며 시위행렬을 해산시켰다. 이 와중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유관순도 이 때 체포돼 3년형을 확정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유관순은 일제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2의 만세운동을 준비해 1920년 3월 1일 이신애, 어윤희와 함께 3∙1운동 1주년 만세를 외쳤다. 어린 소녀들의 만세소리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형무소에 있던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만세를 따라 외쳤고, 그 소리는 형무소를 넘어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 일로 유관순은 일제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3∙1운동 이후 겉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민족 분열을 획책하던 일제는 영친왕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수감자들의 형량을 줄여주거나 석방시켰다. 이 때 유관순도 1년 6개월로 형량이 줄어들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거듭된 폭행으로 어린 소녀는 음식을 넘길 수도 없었고,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1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관순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의 주역이 바로 젊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사회에 타협하고 불의에 순응할 때,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려했던 학생과 청년들이 유관순으로 대변된다. 유관순이 다른 독립운동가의 업적에 비해 과대 포장됐다고 하는 일부 사람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올바른 가치관을 이어받고, 잘못된 행동은 답습하지 않으려는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다. 유관순은 바로 우리 젊은이들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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