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숨결을 불어넣다
독립운동에 숨결을 불어넣다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11.06 22:36
  • 호수 14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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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이봉창(1901~1932)
▲ 이봉창 의사의 동상
▲ 이봉창 의사의 동상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우리의 독립운동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북만주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외교적 활동을 통해 독립의 필요성을 해외에 역설했다. 그러나 간도참변 등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독립운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위임통치안과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침체기를 맞자,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의 불꽃을 되살리고자 했다.


이러한 때에 이봉창 의사(이하 의사는 생략한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며 김구를 찾아왔다. 일본말을 섞어 쓰는 이봉창이 의심스러웠던 김구는 기회가 되면 부르겠다며 되돌려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며 기다릴 테니,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이봉창은 인근 공장에서 일하며 받은 월급으로 술과 국수를 사 와서 요인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거듭될수록 이봉창의 삶의 행적과 생각이 드러났다. 이봉창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원과 운전수습생으로 일을 하면서,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로 언제나 적은 월급과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 일본인을 양아버지로 삼기도 했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차별을 이겨내는 것은 나라의 독립이라고 생각한 이봉창은 그 길로 상해로 건너온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일왕이 거리 행진을 할 때, 행인들과 함께 엎드려 있다가 폭탄을 던지면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봉창의 주장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 김구는 의거용과 자결용 폭탄 2개와 300원이라는 거금을 이봉창에게 주며 의거 활동을 지시하였다. 이봉창은 “프랑스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의거 기념사진을 찍을 때는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라며 오히려 김구를 위로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비록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이봉창의 의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은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며 이봉창 의거를 칭찬했고, 일제는 이를 문제 삼으며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상해사변에 승리한 후, 훙커우 공원에서 승리 자축 행사를 했다. 이때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이봉창의 의거가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크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위대했던 이봉창은 1932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광복 이후 김구는 이봉창의 유해를 1946년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그러나 이봉창처럼 고국으로 돌아온 예도 있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순국선열은 더 많다. 그분들의 유해를 모셔오는 것, 그것이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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