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협객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협객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11.14 13:33
  • 호수 14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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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김상옥(1890~1923)
김상옥 의사의 동상
김상옥 열사의 동상

많은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영화 <암살>에서 모델로 삼았던 김상옥 의사(이하 김상옥)가 동상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상옥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일본 경찰 천여 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인 것이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김상옥이 일제에 맞서 영화 주인공처럼 날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8살의 어린 나이로 돈을 벌며 길러진 체력과 강단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 세상에 나왔지만, 부모와 세상을 탓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피곤한 몸으로 야학교에서 학문을 익혔고, 성인이 돼서는 삼남 지방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면서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영덕철물 상회를 세운 김상옥은 직공들에게 많은 월급과 처우를 제공했고, 밖으로는 일본상품 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3·1운동 당시에는 칼을 든 일본 경찰을 때려눕히고 여학생을 구하기도 했다. 또한 혁신공보를 매회 1천부씩 제작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항일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김상옥은 교육과 언론으로는 독립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 총독과 식민기관을 파괴하는 의열투쟁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한 김상옥은 1922년 11월 사이토 총독을 죽이고 종로 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은 조선 총독을 죽이기 위해 용산 후암동에 거주하는 매부 고봉근 집으로 은신했다.


그러나 친일 순사 조용수에 발각돼 눈이 펑펑 쏟아지던 1월 17일 일본 경찰들은 고봉근의 집을 에워쌌다. 김상옥은 유도 사범이던 경찰 다무라를 죽이고, 눈으로 덮인 남산을 넘어 효제동의 이혜수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월 22일 새벽 5시 천여 명의 무장한 경찰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김상옥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의로운 죽음을 감수하고 일본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김상옥의 총성에 일본경찰은 수천발의 총알을 응수했다. 이후 김상옥은 5채의 가옥을 넘어 다니며 총격전을 벌였지만 3시간이 넘는 교전 끝에 김상옥은 마지막 탄환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며 자결했다.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도 일본 경찰들은 한동안 김상옥 곁으로 오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김상옥이 죽은 것을 확인한 일본 경찰이 김상옥의 주검을 확인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상옥의 몸에는 무려 11발의 총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1발이나 맞았으면서도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총상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자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교전을 벌였던 김상옥이라면 조선 총독 암살이 불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상업수단, 격투실력,  사격술과 전술 모두 뛰어났던 김상옥이 무장독립군을 양성했다면 독립이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김상옥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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