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전지 위, 학생들의 목소리를 그리다
하얀 전지 위, 학생들의 목소리를 그리다
  • 강혜주 기자·이서연 수습기자 정리=박예진 기자
  • 승인 2019.11.29 15:07
  • 호수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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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 학생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 학생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Prologue
대자보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수단 중 하나다. 1980년대 민주화 항쟁 시기에 성행했던 대자보는 당시 마비됐던 언론의 기능을 대신 수행하며 학생들의 공론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학생들의 대자보 게시 행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 역할은 축소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대자보가 다시 학내에서 두드러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대자보의 역사와 현주소를 알아봤다.

대자보의 역사
서구 사회에서는 16세기 이후, 왕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저널리즘이 발달했다. 반면 『세상을 바꾼 미디어』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치하와 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언론이 통제됐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저널리즘의 발달이 어려웠다’고 말한다. 이때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 외에도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의견 표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 대자보였다. 이 용어는 1950년대 중국에서 정치적 도구로 성행한 ‘다즈바오(Dazibao)’를 계승했으나,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 혹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자보는 1980년대에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었고, 1990년대부터는 점점 쇠퇴하는 듯 했다. 하지만 2013년 어느 날, 대학생 및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대자보의 힘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대학가 대자보의 부활과 재확산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후문 게시판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당시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주현우 씨가 작성한 해당 대자보에는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과 밀양 주민 음독사 등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이 만연한 세태를 꼬집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대한민국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3일 뒤 연세대, 이화여대, 용인대, 중앙대, 전북대 등으로 확대됐고 수백 개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자보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민주화 이후 세대의 무기력과 무관심을 질책했다. 그리고 21세기, 안녕하지 못한 사회에서 안녕한 듯 지내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비판하며 2013년도를 아우르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 현재 세간의 화두인 홍콩 대자보
▲ 현재 세간의 화두인 홍콩 대자보

‘One China’ vs 홍콩 민주화
‘안녕들 하십니까’를 계기로 국정 농단과 학내 성추행, 갑질 등 사회문제와 학내 사건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최근 대학가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표출하는 대자보가 등장했다. ‘One China’를 외치는 편과 ‘홍콩 민주화’를 외치는 편으로 나뉜 현재의 국제정치 상황은 양측 갈등을 극대화하며 대학가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 넣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고 연대하기 위해 캠퍼스 안 전시물인 ‘레넌 벽’을 설치하고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홍진모)’을 만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개진했다. 하지만 레넌 벽의 일부가 부서지고 대자보가 찢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홍진모 대표는 “폭력과 허위신고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고민 끝에 형사고소라는 강경한 대책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하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한양대에서도 이와 유사한 충돌이 벌어졌다.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인 중국인들이 홍콩 지지에 대한 대자보가 붙여진 곳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방해했고, 이 과정 중에 대자보 게시자 A 씨의 신상이 웨이보에 공개됐다. 이후 A 씨는 길거리에서 동전을 맞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명지대의 경우 지난 19일, 대자보를 붙이는 과정에서 한국인 A 씨와 중국인 B 씨가 언성을 높이다 몸싸움으로 번져 쌍방폭행 사건으로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현재, 대자보를 둘러싼 논쟁은 고소와 고발, 물리적 폭행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 치솟은 갈등의 결과물인 훼손된 대자보
▲ 치솟은 갈등의 결과물인 훼손된 대자보

종이와 펜의 힘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대자보로 인한 갈등의 발생은 옳지 못한 방향이 분명하나, 대자보가 갖는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작년 우리 대학의 비민주적 학사행정을 규탄하며 ‘복수 학위제 반대’ 대자보를 작성했던 차종관(커뮤니케이션·4) 씨는 “대자보는 대학사회에 건강한 공론장을 만들어주는 좋은 매개체”라며 “학내 익명 커뮤니티에서 쉽게 던지는 말과는 다르게 자신의 이름 석 자와 함께 한 자씩 눌러쓴 대자보의 힘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전했다. 더불어 류은지(동물자원·3) 씨도 “SNS는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데 반해 대자보는 명확한 필자가 드러나기 때문에 무게감이 다르고 정보제공 측면에서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저술한 「대자보 문화의 민중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자보는 구체적인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따르기에 선동 효과가 크다고 설명한다. 또 언론에 대한 비판이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진실을 제공하는 데 있어 그 영향력이 크다. 더불어 형식이 자유롭고 누구든지 필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대자보의 무게와 책임
2015년 5월, 부산의 한 대학에 ‘미술학과의 추잡한 교수를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날짜와 장소가 특정된 내용의 대자보가 게시됐다. 사건 가해자로 지목된 A 교수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이는 소문만 듣고 가해 교수로 오인해 적은 거짓 대자보로 밝혀졌다.


이렇듯 학생들은 대자보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게시할 수는 있어도, 허위사실을 함부로 게시해서는 안 되기에 작성 시 주의가 필요하다. 대자보는 헌법에서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 형법에서는 모욕죄, 명예훼손죄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의 소지도 있다. 법률사무소 제이 박경미 변호사는 “대자보에 상대방의 이름을 김○○ 등으로 표시하였더라도 대다수가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있다면 모욕죄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양형 등에 있어서는 고려가 될 수 있으나 최대한 상대방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더불어 대자보의 하단에 ‘본 대자보는 특정인을 비방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대학 내 부적절한 행위를 고발하고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공공의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대자보에 특정인의 이름을 기재하거나 부적절한 낙서를 하는 등 대자보를 훼손하는 행위를 할 경우 재물 손괴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기재하면 이후 과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우리 대학의 경우 대자보를 비롯한 교내에 게시하는 모든 게시물은 학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는 동아리 방이나 학회실 등 그 구성원이 모이는 공간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장소에 붙여진 게시물에 한정된다. 학교에서 승인받지 않았거나 목적에 어긋난 게시물은 학생팀 직원들의 야간 순찰을 통해 수거되고 있으며 교내 환경 미화원에 의해 수시로 제거될 수 있다.

Epilogue
지난 19일, 한국외대는 홍콩 시위를 둘러싼 재학생들 간의 분쟁이 지속되자 “무책임한 의사 표현으로 학내가 혼란에 빠진다”며 교내에 부착된 대자보를 모두 철거했다. 대자보가 언론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개인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그 어떤 외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외대와 같이 분쟁 조정을 이유로 대학이 이러한 독단을 행한 것은 분명 의문스러운 조치다.


대자보는 이제 의견 표출을 넘어 대학 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 속으로 숨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주관을 소리 높인다는 건 확실히 용기 있는 행위다. 틀림을 바로 잡고, 불의에 저항하는 분출구인 대자보. 앞으로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소리 낼 수 있는 발언대가 마련되는 대학 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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