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였기에 더 대단한
2인자였기에 더 대단한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11.29 15:07
  • 호수 14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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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이시영(1869~1953)
▲ 무장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은 이시영
▲ 무장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은 이시영

이시영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은 독립운동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나라의 기틀을 만든 분이다. 이시영은 평생을 맨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보다는 늘 뒤에서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현재 가치로 600억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이회영은 기억하지만 이들과 함께했던 이시영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시영은 드러나지 않는 2인자였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과 가깝고 오랫동안 뜻을 함께해왔을지라도, 생각이 다르면 따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시영은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작은 거인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시영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치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안창호, 이동녕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양성한 독립군으로 일제를 내쫓은 뒤,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형 이회영의 뜻을 좇아 1910년 12월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서간도 삼원보로 가족들과 망명했다. 이시영은 떠나면서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설 이 시간으로부터는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했다.


삼원보에서 이시영은 경학사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청산리 전투와 같은 무장 독립운동에서 큰 활약을 벌인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시영은 초대 법무 총장으로 참여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하는 일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 탄핵과 국민대표회의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난 뒤에도, 이시영은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임정의 어려운 경제 살림을 맡았고, 윤봉길 의거 이후 항저우에 피난처를 만드는 등 조력자 역할을 했다.


이렇듯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인생을 바쳤던 이시영은 1945년 7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이시영은 국내에 돌아온 후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경희대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관료로 등용하자 크게 낙담했다. 특히 6·25전쟁에서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비리가 끊이지 않자, 전쟁 중인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하며 항거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이승만을 견제하고 올바른 나라를 세우고자 출마했으나, 부정선거와 고령 등의 이유로 낙선하고 만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궂은일을 담당했던 이시영은 1953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2인자로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최대의 성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고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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