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여름, 당신의 세계는」
제43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여름, 당신의 세계는」
  • 서가영(문예창작·3)
  • 승인 2020.04.14 17:24
  • 호수 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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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당신의 세계는」- 안녕히 주무세요

서가영(문예창작·3)


산소가 부글부글 끓어 입안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온 힘을 풀고 가만히 누워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비로소 당신의 세계가 끝나간다.

지독한, 여름이다.

*

봄을 상징하던 분홍빛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은 이미 한참 전에 푸른빛을 띄우며 여름을 맞이하려는데 마지막 봄비는 뜨거워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태양은 내리쬐는데 알 수 없는 서늘한 공기가 떠다녔다. 그게 징조라곤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옷을 한 겹 더 겹쳐 입었다. 이 이유 모를 공기만 뺀다면 모든 게 완벽한 여름날이었다. 머리 위로 태양이 반짝 빛난다. 아니, 어쩌면 이 서늘함이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학교를 향하는 아이들의 밥을 챙겼고, 출근을 했다. 점심이면 끊임없는 외근과 외근, 겨우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면 하루 보고를 하고 퇴근을 한다. 집에는 나를 기다리는 중학생 막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그리고는 새벽에나 들어올 첫째를 위한 간식을 준비한다. 나의 일과는 끝이다.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당신의 소식은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나의 삶을 사느라 멀리 떨어져 당신께 가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못했다가 더 맞는 표현일까. 나는 또다시 반복될 하루를 위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열어둔 창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나를 감쌌다. 여전히 뜨거워질 생각이 없는 서늘함이었다.

그날도 똑같이 출근을 하려는데, 머릿속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어제 창문을 열고 자서 감기가 든 걸까, 매번 환절기마다 으레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가장 중요한 미팅을 30분 앞둔 시간이었고, 아주 뜨거워야 할 한낮이었고, 태양이 반짝 빛났다. 차가운 기운이 훅 내 몸을 감쌌다.

낯선 소독약 향 사이를 가로질러 도착한 그곳에서 목격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유, 그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 자체로 충격인 것에 무슨 이유를 더할 수 있을까. 제대로 숨을 쉴 생각도 않고 당신 옆에 주저앉았다. 당신은, 나의 당신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든 생각은, 당신이 아침마다 나를 마중하며 봤던 수많은 드라마들은 역시나 모두 거짓이구나, 였다. 우습게도 그랬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런 얌전한 죽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내 두 눈에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제야 겨우 눈물이 났다. 며칠 간 나를 괴롭히던 서늘함은 당신의 온기였을까.

나는 몹시 바빴고, 당신을 지켜줄 사람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있었다. 지독한 약냄새가 싫어서, 무너져가는 지독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지독한 것만 가득한 모습이 끔찍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들며 지난 5년간 찾지 않던 병원이다. 끔찍하긴 했어도, 매일같이 자잘한 상처를 달고 방문하는 사람들과 언제나 바쁘게 병동 사이사이를 움직이는 간호사와 의사들로 가득한 병원은 참으로 활발한 공간이라는 생각 했는데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곁에 서서 서로의 손이나 맞잡을 수밖에 없는 당신과 나, 이 상황이 참으로 무력했다.

그토록 커다랗던 당신이 겨우 이 자그만 병실 침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나의 심장이 함께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당신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아주 흐릿한 기억이다. 어린 나는 울고 있다. 머리가 두어 개 차이나는 또래 남자애와 다투고 있는 듯 보였다. 주변의 아이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어린 나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큰 모양으로 둘러싸여 단체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는 그런 상황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기보다 큰 남자애를 향한 날선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남자애는 어린 나를 내려다보며 무어라 큰 소리를 냈다.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곳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 나와 그를 지켜보는 나, 두 사람이었다.

나는 결국 서럽게 울며 집으로 달려갔다. 놀러간다고 신나게 동네 어귀로 달려갈 때는 언제고 온통 젖지 않은 곳이 없는 얼굴이 된 나를 본 당신은 부엌에서 칼을 내려놓고 신발도 벗지 못하고 계속 얼굴을 적시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여. 따뜻한 당신의 목소리에 더 얼굴이 뜨겁게 적셔지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자 더 하하호호 신이 난 아이들의 사이로 당신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야, 이 녀석들아. 어린 나는 커다란 당신의 몸을 붙잡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당신은 단번에 좀 전까지 어린 나를 내려다보던 또래 남자애를 찾았다. 어린 나는 당신의 손에 의해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게 되었다. 당신은 매서운 얼굴로 남자애에게 호통을 쳤다. 이전과 달리 당신을 올려다보던 그 애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당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네 어귀를 서둘러 떠났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에 동네가 조용해졌다.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 사이로 사라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뒷모습이 내게는 그 높고 높다는 큰 산에 못지않았다.

뒤를 돌아선 당신은 찌개가 끓는다며 서둘러 따라 오라고 헛기침을 했다. 어린 나는 그제야 젖은 얼굴로 헤헤 웃는다. 뭘 잘했다고 웃어. 너도 똑같아, 이놈 기집애야. 따뜻한 당신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

“휴지, 필요해요?”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가 들렸다. 필요할 텐데…. 이상한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으로 맞춰 입은 게, 이 사람도 유가족인가, 싶었지만 분명히 상복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손에 들린 하얀 휴지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우울한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환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필요할 줄 알았다니까요. 감사하지만 이만 나가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휴지를 건네고 뿌듯해 보이기까지 한 그 얼굴에 입이 막혔다. 말할 차례를 잃자 그 사람은 바로 차례를 받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어요.”

“네?”

“이러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구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팔목에 찬 검은 시계를 보더니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을 잡고 있는 손과 그 사람이 붙잡은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글쎄, 시간이 없대두요. 그 사람이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잡고 있던 손이 침대로 툭 떨어졌다. 시선이 다시 당신을 향했지만 그 사람은 당신에게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더는 곤란해요, 이미 충분히 늦었다구요? 여전히 당신은 침대 위에 있고, 맑은 얼굴이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어디에 홀린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잠깐 얼이 빠져있었던 게 아닐까. 그 사람은 늦었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병원이 그렇게 크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걷는 동안 꽤 많은 병실을 지나쳤다. 안쪽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가벼워지는 게 입구와 가까울수록 나이가 많은 사람을 입실시키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엘리베이터로 나를 이끌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층에는 지금까지 본 병동과는 느낌이 달랐다. 카트를 끌며 병실을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도 없었고,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의사도 없었고, 게다가 환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느 병실로 들어갔다.

“다행이 너무 늦지는 않았군요!”

텅 빈 병실이었다. 그 사람은 뭐가 좋은지 변치 않는 맑은 얼굴로 병실을 훑었다. 침대도, 의자도, 서랍장도 아무것도 없는 병실인데 그 사람은 무언가 있는 것처럼 꼼꼼히도 살폈다. 그나저나 새로운 병동일까. 왜 여긴 아무것도 없는 거지. 나도 따라 두리번거리니 그 사람은 다시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만지작거리다가 내 팔에 채워주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즐거운 여행이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너무 오래 다녀와선 안돼요.

그럼 안녕히.

2019년 6월. 김순영 씨, COMA 출발합니다.

*

눈을 뜨니 침대였다. 이게 뭐야, 꿈이라도 꾼 걸까? 그 사람이 채워줬던 검은 시계도 없었다. 정말 꿈이었을까. 하지만, 당신의 감각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기분이 이상했다. 방 밖으로 나오니 집 안에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애들은 학교 갔나. 그러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몇 시지. 원래 시계가 있던 쪽의 벽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모든 시간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어떤 여자가 사람들에게 기댄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거실 한 가운데 서있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방문 뒤로 숨었다. 엄마, 괜찮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쩌다보니 엿듣게 되었는데 최측근에게 사고가 일어난 것 같았다. 온몸을 기대고 온 여자는 그들의 엄마고 그를 둘러싼 세 사람은 아들과 딸인 모양이었다. 분명 우리 집이 맞는데 다른 사람 집에 몰래 숨어 들어온 도둑이 된 것 같았다. 정적이 계속되었다. 가장 큰 아이로 보이는 남자가 엄마 그러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쉬자, 하고 여자를 일으켰다. 다른 아이들도 남자를 따라 힘이 빠진 여자를 지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네 사람은 내가 숨은 방 쪽으로 다가왔다. 아, 어떡하지, 이대로 들켜버린다면…….

괜한 걱정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이지 않는 거였다. 나는 이곳에서 철저하게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꿈일 거라 생각했던 그 만남이 실제였다는 말인가. 나는 이상한 기분에 침대 쪽으로 가까이 갔다. 하지만 곧 다시 뒷걸음 칠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집 밖으로 당장 뛰쳐나왔다. 어디에 홀렸다고 생각했더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학창시절 숙제로 읽었던 심리 무슨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대로 움직이는 꿈. 그래, 나는 지금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충격적인 당신의 모습에 환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건 현실이 아닌 게 분명했다.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만한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꿈이나 환상일 테니 누군가 만나면 나를 이곳에서 꺼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그렇게 계속.

하지만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지나가는 이 하나 없었고, 나는 계속해서 집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머리 위로 태양이 반짝였다.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이상하게 서늘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나였다. 집 앞 공원에 잠시 숨을 고르기로 하고 앉았다. 괜히 주변을 살펴보는데 공원 입구에서 첫째가 걸어오고 있었다. 첫째는 학생 티를 벗고 꽤나 성장한 모습이었다. 그 옆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어머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까. 여자는 긴장한 얼굴로 첫째를 바라보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첫째의 얼굴은 마냥 행복해보였다. 나는 그 둘을 따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는 첫째처럼 조금 늙어 보이는 내가 있었다. 첫째는 나를 향해 여자 친구라 소개하고,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첫째와 여자 친구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그래도 아직 어린 첫째의 얼굴을 바라보다 밥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지금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첫째가 조금 후면 저렇게 되어 나타나게 될까.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가득한 식탁을 거실에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저 여자애는 영 아닌 거 같은데….

잠시 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나 나와 첫째에게 나타난 것처럼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미미하게 변한 우리보단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째의 방이었던 곳엔 세 남매의 모든 짐이 쌓여있는 창고로 바뀌었고, 무언가 항상 가득 차있던 둘째의 방은 조금 휑해졌다. 게임기 없이는 못 살던 막내의 방엔 두꺼운 전문 서적들이 가득했다. 내 집이 내 집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첫째는 나갔는지 불 꺼진 주방에서 나 혼자 턱을 괴고 앉아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학창시절 여자 친구는커녕 여자와 붙어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첫째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일하게 켜진 식탁 위 조명이 나의 머리 위에서 깜빡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나는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몸이 절로 움직였다. 내가 향한 곳은 온통 노란색으로 휘감긴 집이었다. 사주를 보는 곳인 것 같았다. 나는 점쟁이에게 첫째의 이름과 처음 보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함께 내밀었다. 긴장된 얼굴로 결혼을 하겠다고 함께 말하던 여자의 이름은 아니었다. 점쟁이는 극도로 화를 내면서 이 둘은 절대 만나게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하지만 우리 애가 지금 만나는 사람인걸요, 했지만 점쟁이는 단호했다. 둘은 만나면 결국 헤어지게 될 사주야. 절대로 안 돼. 온통 노란색인 집에서 노란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 다시 꺼졌다.

환한 빛에 고개를 드니 좀 더 늙은 내가 이제 어엿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이 많이 성장한 첫째와 다투고 있었다. 점쟁이가 절대 안 된다고 하잖니. 엄마는 몇 년을 봐온 나보다 처음 본 그 점쟁이 말을 믿어요? 첫째는 나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간다. 나는 큰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같이 큰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어 조용한 집에 쾅 소리가 울린다. 공기의 진동이 멎자 이제는 문틈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심통인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다투었다고 믿을 수 없이 첫째의 표정이 밝다. 엄마, 이 좋은 날 표정이 왜 그래요. 첫째의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예식장이었다. 신부의 이름에는 둘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둘째의 결혼식인가, 다행히 첫째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하지 않았나 보구나.

신부 측 부모 석에 앉아 바라본 둘째의 뒷모습은 그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았다. 평소에는 미운 짓만 골라 해대는 철부지였는데 이렇게 천사같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둘째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더니 서로 마주보는 신랑과 둘째의 모습에 아예 고개를 숙여 울음을 터뜨렸다. 첫째는 내 옆에 앉아 오기 전이랑 비슷한 말을 했다. 엄마, 이 좋은 날에 왜 울어요.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들자 장소가 바뀌었다. 아주 큰 레스토랑이었다. 식탁 가운데에서 막내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막내와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다. 막내가 앉은 같은 방향에 나와 첫째, 둘째와 둘째의 남편이 앉았다. 건너편에는 여자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막내의 상견례 자리였다.

둘째는 막내에게 오빠처럼 금세 헤어지지나 말아, 하고 장난을 쳤다. 아, 이전에 했던 안심은 착각이었구나. 나는 날 보지 못하는 첫째를 노려보았다. 첫째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막내는 이런 자리에서 왜 그런 얘기를 하며 화를 냈다. 하하호호 웃는 자리에서 나는 점점 멀어져갔다.

뒷주머니에서 무언가 삐삐삐, 하고 울었다. 검은색 초시계였다. 모든 소리가 없어지자 세상은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그곳에 서있는 나는 허리가 많이 굽혔고 피부는 전보다 더 주름이 져있었다. 초시계가 갑자기 펑 터졌다. 그게 신호인지 영화관처럼 무수한 사진들이 눈앞의 벽을 가득 채운 채로 지나갔다.

침대에 누워 나를 어떻게 할지 다투는 나의 소중한 아이들, 함께 지내며 아픈 나를 돌보는 첫째, 매일같이 전화를 해도 사흘에 한 번 받는 둘째, 첫째에게 빚을 지고 다시는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 막내. 초시계가 울리기 전의 장면과는 관계가 많이 바뀌어 있지만, 여전히 두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닮은 소중한 손주 녀석들까지 한 번에 훅 지나간다.

미안한 표정으로 요양원에 입원 시키는 첫째의 얼굴과 요양원의 풍경이 함께 지나간다. 산더미처럼 쌓인 약 봉투가 지나간다. 치매, 그리고 다시 암이라는 무거운 병명을 말하는 의사의 얼굴이 지나간다. 계단에서 넘어져 처음으로 탔던 응급차가, 오고 가며 인사하던 이웃들이, 둘째가 취미로 하라며 마련해준 집 뒤의 텃밭이, 이혼서류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첫째가, 이제 그만 일해도 된다는 회사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했던 고객들이, 멀리 떠나 결국 사진으로 돌아온 남편이 지나간다. 사진 하나에 담긴 수억 개의 감각들이 멈춰선 나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준 당신이. 뜨거워야 할 여름, 미지적근한 공기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산소를 입 안으로 겨우 넣고 있는 당신이 지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한 당신이, 나의 세상에 마지막으로 지나간다. 불이 꺼졌다.

*

어떠셨나요, 즐거운 여행 되셨나요? 당신이 마주한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재. 이들은 모두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까지 당신이 간직하게 될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이 당신의 현재,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입니다. 우리의 지금은 감히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차지하고 있죠. 이상하죠? 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그러니까 당신의 소중한 기억이 당신의 당신을 잃는 기억이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한없이 커다랗던 당신의 당신이 한없이 작아진 그 순간을 아파하면서도 강렬하게 아끼고 있는 걸요. 그건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이제 당신은 이 모든 기억을 품고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그 안에는 당신이 여행을 하는 동안 당신을 찾은 이들의 목소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떠났느냐는 원망의 목소리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그랬냐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이제는 편안하게 쉬어도 된다는 따뜻한 목소리도,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안심하고 푹 잠에 드시면 됩니다. 어떻게, 모두 끝마칠 준비가 되었나요? 그렇군요. 당신께 휴지를 건넬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디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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