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읽자!
‘흐름’을 읽자!
  • 유헌식(철학) 교수
  • 승인 2020.05.20 02:00
  • 호수 14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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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식(철학) 교수
유헌식(철학) 교수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이른다. “음표와 음표에만 집중해서 하나씩 끊어서 치다 보면 음악의 흐름을 잃게 돼. 그러면 음악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어.” 음악의 아름다움은 음표 하나하나의 독립적인 소리가 아니라 음표들이 이어져서 자아내는 리듬에서 온다. 리듬은 흐름이다. 악보의 개별적인 음표에 집중하다 보면 음악이 흐름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악보만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든 텍스트는 내적인 흐름을 지닌다. 텍스트의 생명력을 흐름이 이끌기 때문이다. 흐름이 없는 텍스트는 죽은 생명이다. 그래서 음악의 흐름을 파악하고 따라가야 하듯이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에도 글과 말의 흐름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텍스트의 저자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기만의 흐름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글이나 말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텍스트 내의 흐름을 파악하는 관건이다.

 

모든 텍스트는 겉으로는 점()들의 집합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점들이 연결된 선()으로 구성돼 있다. 글의 경우 우리의 시각과 사고는 일단 점, 즉 개별적인 단어에 머물지만 곧이어 우리는 그 단어들이 그려내는 동선(動線)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주의력은 단어들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태의 흐름은 단어들(점들)이 아니라 단어에서 단어로의 이동()’에서 비롯한다. 단어들은 전후의 맥락과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꼬리를 달고 있다. 흐름을 읽는 일은 곧 이 꼬리들을 연결하는 일이다. 흐름 따라가기는 긴장을 필요로 하나 일단 흐름을 타고나면 저자의 지적 호흡을 감지하게 돼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텍스트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책의 경우 글에 담긴 저자의 호흡은 글 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만들어 글이 하나의 의미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올바른 독서를 위해서는 개별적인 자구(字句) 해석에 매달리기보다는 글의 맥(), 즉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모호했던 용어들도 차츰 명료해진다. 책을 빨리 읽으면서도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은 글의 단어가 아니라 단어가 움직이는 방향, 즉 흐름을 읽고 타는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향상될 수 있다. 흐름을 타는 순간 몇몇 단어나 구문을 놓쳐도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사태의 흐름을 파악하는 자가 사태를 주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텍스트의 흐름은 저자의 의식에서 비롯한다. 의식이란 제임스(W. James)에 따르면 사슬이나 기차처럼 단위들의 합성물이 아니라 이나 흐름처럼 이미 항상 흐른다.” 흐름으로서 의식은 텍스트에 흐름을 만든다. 의식의 자식인 텍스트는 그 자체가 연속적 흐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도 어리석은 독자는 이를 불연속적으로 끊어서 읽으려 한다. 역사를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말한다. “인간의 망상은 연속적인 운동을 임의로 구분해 불연속적인 단위로 만드는 데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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