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悠閑)한 시간
유한(悠閑)한 시간
  •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 승인 2020.05.26 23:06
  • 호수 14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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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오월이 덧없이 가고 있다는 옛 선비들의 서정(抒情)을 체험하고 있는 나날이다. 지금 공원에는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텐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규율 아닌 규율 때문에 봄꽃을 즐길 수 없다니.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일상을 정지시켰다. 대학 강의마저 원격강의로 진행되고 있으니 중세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 재앙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니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동영상 강의를 제작하고 학생들의 질의에 응답하는 시간 외에는 시간이 정말 많아졌다. 학기 중에는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두꺼운 원전이나 난해한 이론서만이 아니라 소소한 내용의 수필들도 꼼꼼하게 읽을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아침 윤오영 선생의 수필 유한한 시간을 읽었다. ‘바쁜 생활에 헤매다가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벽을 바라보며 느꼈다는 유한(悠閑)한 시간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외물(外物)들 때문에 가려졌던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한 시간이다. 때문에 유한한 시간이 마음을 살찌게 한다고 윤 선생은 진술하고 있다.

 

산처럼 밀려오는 파도, 은구슬이나 옥구슬처럼 흩어지는 물거품, 성난 고래 같은 격랑의 바다지만 만고의 정적을 안고 있는 깊은 바다 해심(海心) 또한 바다이다. 그러므로 바다의 총체적인 모습은 유한한 시간이 있어야 보인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고안해 놓은 낯설게 하기라는 장치는 일상을 벗어나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은 멈춤이 아니라 비약의 시간이다.

 

이번주는 5월의 마지막 주이다. 예전 같으면 중간시험이 끝나고 교수나 학생들 모두 더욱 공력을 기울이는 시기이다. 한 학기의 성패는 이때 판가름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집에 있다. 코로나19라는 치명적인 전염병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유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하고 비경제적인 하루하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이 울 밑에서 국화를 캐다가 하염없이 남산을 바라보는 도연명의 유한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니 오히려 지금을 귀거래사도화원기라는 동양 최고의 명작이 잉태되고 있는 시간이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뜻밖에 얻은 빈 시간을 내공 수련의 시간, 성찰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슬기로운 일이 아닌가.

 

현재 우리는 생활의 연속성이 끊어진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루하루 생활을 하고 있는데 생활이 아닌 것 같은 패러독스한 느낌 속에 그냥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단절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참다운 지성인들이다. 마스크 착용하기, 사회적 거리두기, 원격강의라는 낯섦도 생활이고 경험이지만 이러한 낯섦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살펴보고 우리 삶을 안팎으로 자세히 해부해본다면 정말 마음을 살찌게 만드는특별한 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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