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맥주와 장아찌의 관계를 파악하다
사르트르, 맥주와 장아찌의 관계를 파악하다
  • 이준형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03 00:04
  • 호수 1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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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르트르
▲ 존재 이전부터 목적을 가진 맥주
▲ 존재 이전부터 목적을 가진 맥주

귀찮고 피곤한 여름이라면 찬물에 밥 말아 곰삭은 장아찌나 얹어 먹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장아찌 만들기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게 흠. 만약 쉬운 방법으로 장아찌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방법은 이렇다. 하나, 마늘깻잎고추 등 각종 채소를 씻은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단지에 넣는다. 둘, 간장식초설탕 그리고 ‘맥주’를 2:1:1:2의 비율로 섞은 재료가 담긴 단지에 가득 붓는다. 셋, 일주일 뒤 찬밥에 얹어 맛있게 먹는다. 어떤가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겠나?

본질은 존재에 선행한다? 아니,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굳이 이 레시피의 흠을 잡자면 이게 아닐까. 바로 재료에 ‘맥주'가 들어간다는 거 말이다. 생각해보자, 맥주가 대체 왜 만들어졌는지. 당연히 ‘시원하게 마시고 적당히 취하는 데에 있는 것’ 아닐까? 그 즐겁고도 명료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지난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장인이 피땀 흘려 맥주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시원하지도, 취하지도 못하는 맥주는 결코 맥주라 부를 수 없다. 즉, 맥주는 그 ‘존재’ 이전부터 매우 확실하고도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음식이다.

앞서 이런 존재와 본질의 관계와 순서에 대해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20세기의 마지막 철학자라 불리는 사르트르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만약 맥주와 장아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인간은 맥주와 다르다”고 일갈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맥주와 달리 ‘존재에 앞선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란 얘기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결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이유가 특정한 목적이나 본질이 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즉,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무한한 자유를 가진 ‘인간’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함의 의미는 단순히 자신의 현재가 어떠한가를 밝히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에 어떠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그 존재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만들고 바꿔나간다. 도마와 칼은 누가 뭐래도 도마와 칼일 뿐이고 맥주는 그저 맥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목표로 한 무엇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에 발전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 하거나 종교, 미신에 의지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거나 주변 환경을 핑계 대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항상 주체적이고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모습. 진정한 인간 실존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참여를 동반한 자유, 앙가주망

사르트르의 관심은 개인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한 나의 결정은 주변 사람들, 나아가 국가와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히틀러 개인의 의지와 결정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반대로 장애를 얻었음에도 좌절하지 않은 스티븐 호킹의 열정은 현대 과학 문명의 진보를 앞당겼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 혹은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와 관련해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표현되는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전 세대에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집단적 폭력,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나 이를 억누르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결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지하 조직의 전단을 만들고, ‘파리 떼’와 같은 저항적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현대』라는 진보적 성향의 잡지를 만들고 민주혁명연합이란 단체를 조직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사르트르가 눈을 감은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 그에 대한 관심은 이제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바탕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을 삶 속에서 실천한 그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본받을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나 ‘안 된다’며 변명과 타협만 일삼는 우리에겐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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