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배보다 크고, 귀는 눈보다 크다
눈은 배보다 크고, 귀는 눈보다 크다
  • 유헌식(철학) 교수
  • 승인 2020.06.17 19:04
  • 호수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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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식(철학) 교수
유헌식(철학) 교수

 

의식주(衣食住)만을 생각하면 부자(富者)와 빈자(貧者)의 일상생활은 큰 차이가 없다. 부자라고 해서 호화주택에서 금의(錦衣)를 입고 진수성찬을 먹지는 않는다. 재력이 일상적 삶의 패턴에 차이를 만들긴 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힘겹게 재산을 축적하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왜 의식주에 필요한 액수 이상으로 돈을 벌려고 할까?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따르면 재산축적 행위는 자신의 소유물이 지닌 효용(Utility)을 넘어 자신의 탁월함(Distinction)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한다. 누군가의 삶을 진정으로 부러워하는 것은 그가 먹는 훌륭한 음식이 아니라 음식의 내용과는 무관한 훌륭한 식기와 식탁 때문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눈은 배보다 크다(The eye is larger than the belly)’는 영국의 속담을 소개한다. 위(胃)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무리 맛있고 귀한 음식이라도 먹는 양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상의 크기는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배(腹)의 용량은 눈(目)의 용량을 따라갈 수 없다. ‘봄’으로써 야기되는 욕구는 일상의 경제행위를 촉진시키는 시금석이다. 나의 소유물을 부러워하는 주위의 눈들이 없다면 나는 애써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인도에 홀로 살 계획인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듯 ‘보는 것’은 ‘먹는 것’을 압도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들리는 것’을 능가하지 못한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가치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더 민감하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은 나에 대한 주위의 평가만큼 강하게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시적인 것이 더 지속적이고 인간의 행복감에 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이 제기한 『소유나 존재냐』의 물음이 여기에서 힘을 얻는다. 남들보다 더 가졌어도 멸시받는 삶이 있고, 덜 가졌어도 존경받는 삶이 있다. 우리가 정의나 공정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이유다. 내 귀에 들리는 말이 내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야 내 삶도 만족스럽다. 무엇을 볼 것인가보다 무엇이 들릴 것인가가 나에게는 더 큰 관심거리이다. 그래서 귀는 눈보다 크다.


‘본 것’ 자체보다는 ‘본 것을 말하는 것’이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말은 전파력을 지녀서 누군가의 평판에 결정적이다. 그래서 내 귀의 욕구는 내 눈의 욕구보다 더 강력하다. 대나무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얘기를 담은 설화에도 들리는 것의 가치가 잘 드러난다. 들리는 것은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認定)과 관련된다. 헤겔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은 자기의 인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한다. 인정은 상대방의 말에서 온다. 나에 대해 좋은 말이 들리게 하는 일은 내 삶의 인정(긍정)을 위해 필수적이다. SNS상에서 발견되는 ‘가짜 뉴스’나 ‘악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고발과 법적 다툼은 ‘들리는 말들’이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들은 나에 대해 무슨 말들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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