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일이에요
가을의 일이에요
  • 조하은(문예창작·1)
  • 승인 2020.09.29 13:22
  • 호수 14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지구는 다소 다혈질이다. 태풍을 밤에 풀어 놓고는 금세 딴청을 피웠다. 그러니까 나의 원룸을 몰아세우는 비바람으로 새벽을 꼬박 지새운 날, 나는 5시가 다 돼서야 잠이 들었다. 작은 하품을 굴리며 일어났을 땐, 태풍 대신 사랑하는 가을 냄새가 원룸 밖으로 도착해 있었다. 마음이 보송보송하고 가벼워서 부지런히 움직여 몸을 씻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방을 활주했다. 촉촉한 볕이 창가에 제법 고여 있었고, 나는 빨래를 했다. 그리고 이불을 차곡차곡 개어 품에 안았다. 미룬 세탁소에 오늘만은 기필코 다녀오겠단 다짐과 함께였다. 난데없는 계절이 난데없이 선물한 의지였다.

네이버를 켜서 검색해 보니 세탁소는 내가 자주 가는 편의점 옆, 바로 그 옆집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나는 그동안 주위의 것들에 누구보다 무감했구나. 가게도 별로 없는 동네에서 이걸 모르다니. 

이불 두 장을 안고 부지런히 모퉁이를 돌아 걸었다. 차가 많이 주차돼 있지만 사람 냄새를 맡기 어려운 아파트를 지나서, 조그마한 밭 앞을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세탁소. 서글서글한 주인아저씨는 내 주소를 받아적으며 다음 주 수요일에 픽업하러 오라고 하셨다.

집에 와서는 모든 창문을 열었다. 다 돌아간 세탁기에서 빨래들을 꺼내어 드높은 하늘에 걸어 두었다. 내 어깨도 함께 걸어 뼈와 살을 말려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향긋하게 톡 쏘는 젖은 옷 냄새가 바람이 움직일 때마다 내 쪽으로 불어왔다. 나는 베란다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택배 상자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다 정리했을 때, 이틀 전 주문한 책들이 배달 왔다. 그 속에는 예쁜 포장지로 포장된 유리컵과 북엔드, 책 열네 권이 동봉돼 있었다. 문득, 좋은 날이다, 좋은 날이구나 했다. 나는 의욕적으로 책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저녁에는 한과 식사를 같이 들기로 약속했다. 날이 좋으니 하천을 산책하고, 방 안에서 작은 디너쇼를 열자고. 이번 가을은 직선으로 온 것 같은데. 어쩌면 간헐적일 수도 있는 건강한 서늘함을 오래 붙들고 싶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