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거움에 대한 재인식
언어의 무거움에 대한 재인식
  •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 승인 2020.11.10 16:24
  • 호수 147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두식(자유교양대학) 교수

언어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성경이 시작되듯이 인간과 언어가 융합되면서 문명이 시작됐다. 단어 하나하나에는 인간 경험과 시간이 축적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무게를 가진 단어들도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들도 의미를 살펴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들이 많다.


‘BTS’나 ‘블랙핑크’하면 곧바로 ‘한류(韓流)’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권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한류라는 단어 속에는 한국 대중문화의 고유성과 우수성만이 아니라 한국의 국력과 높아진 위상이 함께 함축돼 있다. 한국인들에게 한류는 단순히 한국 대중문화를 특정하는 단어일 수가 없다. 이렇듯 언어는 사전적인 의미 이상의 역사와 의의를 갖고 있다.


최근 언론에 ‘커밍아웃’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성 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당당하게 공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외래어다. 이 단어 속에는 타자화돼 암흑 같은 삶을 살던 성 소수자들의 역사와 수난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거운 단어가 일반화되거나 희화화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작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성 소수자 단체에서는 커밍아웃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에 항의를 하고 있다.


예전에 지상파 TV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가 “나 완전히 마루타가 됐네”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마루타’란 한국인의 입에서 쉽게 나올 단어가 아니다. 실험 쥐 모르모트와 일제 731부대의 생체실험대상자를 말하는 마루타를 어떻게 혼동할 수 있을까? 이 장면에 대해서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현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아직도 마루타 아르바이트, 마루타 타투와 같은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불길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과 언어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고찰하지 않고 언어를 의사소통의 매체로 단순히 상정하더라도 요즘 우리는 언어를 너무 가혹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를 생각하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어떤 사람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비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라는 속담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이 착종하고 SNS를 통한 메시지가 공식적인 메시지를 압도하는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다. 주체의 분열과 반성 없는 언어 활동을 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시국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보다 신중한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 인터넷이나 SNS상의 글들은 삭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글을 쓸 때 최종적으로 퇴고를 하듯이 언어생활을 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숙고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 도래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