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화경대
  • 김일수
  • 승인 2004.04.01 00:20
  • 호수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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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보뢰’는 우리 속담에 나와 있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유사한 어구이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우리 속담이 뒤늦은 후회를 강조한 반면, ‘망양보뢰’는 뒤늦은 행동을 힐난하지 말고, 실수나 실패 후에 재빨리 수습을 하면 그래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서양 속담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
3·12 탄핵사태를 보며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메신저로 사발통문이 돌고, 인터넷에는 탄핵 반대 카페들이 속속 생겨났다. 들불처럼 번지는 시민들의 분노를 모으고 대규모 집회로 조직해내는 곳은 ‘탄핵 무효와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 행동 준비모임’(범국민행동)으로, 지난 3월 13·14일 서울 광화문 등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틀 동안에 탄핵 무효를 위한 성금 모금도 7200만원이 걷혔다. 어떤 시사 주간지의 편집장은 고정칼럼을 쉬면서 “…사흘이나 지났으나 머릿속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고 떨리는 손 때문에 펜을 들 수 없을 지경이니 너그럽게 용서하기 바란다.”고 하면서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집회장에서 만난 10대 학생들의 동정을 전하는 기사들에는 “쉬는 시간마다 TV를 켜고 탄핵 가결 장면을 지켜봤다”면서 탄핵안이 통과되던 장면을 두고 “리얼한 이종격투기”였고 “힘센 놈이 약한 놈 괴롭히는 짱나는 장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표현의 차이는 있을망정 분노와 경악에는 큰 차이가 없을 성 싶다.

우리 국민은 정치 사회적 민주화시기를 겪으면서 나름의 역사발전을 이루었다고 자부하여 왔다. 과정의 고통과 어려움 못지않게 그에 상응하는 보람과 희망을 가졌던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들도 익숙해져서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되어버린 이른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이하여 우리 사회는 다시금 역사 발전의 ‘퇴보’와 ‘진보’라는 시각차를 사이에 두고 입공방이 한창이다. 뿐만 아니라 조금 성급하게는 입공방에 그치지 않고 편이 갈려서 험악하게 물리적 대결국면으로 치닫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탄핵정국 자체가 노대통령이 구상한 총선용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마저 있는 형편이니 나라꼴이 정말로 말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한번쯤 숙고해 볼 일은 없을까.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현상에 부화뇌동하기보다 이런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씩 면밀히 살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당리당략과 국면전환, 편 가르기를 통한 세력 결집 등의 정치적 계산이 없는지 냉정한 눈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것 또한 말할 나위 없을 터이다.
탄핵에 놀라기는 대학가도 마찬가지였다. 탄핵 관련 강의·강좌가 마련되고 학생들의 탄핵 규탄 대회가 열리는 등 ‘탄핵 정국’으로 예사로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탄핵 관련 시국 토론회를 열고 열띤 토론을 벌인 대학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 탄핵에 따른 학생운동 방향’ 등등의 토론회와 초빙 강연회가 한차례 대학가를 휩쓸었다. 모든 것이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내가 믿는 것은 또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아주 느리지만 민주화로 나아가는 행보를 해왔다는 것이고, 이번에 시민사회가 보인 대응은 노무현대통령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무현 정권이 수호해내지 못한 부분들을 87년 6월항쟁처럼 확보해내기 위한 것이란 믿음 말이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사회로 성장하고 거듭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망양보뢰의 교훈인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 것이다.
김일수<공주영상정보대학·교수>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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