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안부
형식적인 안부
  • 오선명(해병대군사학∙3)
  • 승인 2021.09.07 16:21
  • 호수 148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이면서 안락감을 느껴본 적 있어요
끝없이 파고드는 칼날도 결국은
살가죽과 뼈마디에 부딪혀 제지된다는 것을 아나요

스윽 베이면 피부에 핏방울이
맺히는 게 보여요. 빨간 것을 알고부터 아프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가죽 덩이일 뿐인데 자꾸 파고드나 봐요
피가 펑펑 샘솟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악을 쓰던 밤이 있었는데요
새벽이 춥다 못해 아늑하고 따듯하던 날
지구의 마지막처럼 모든 것을 달관하고 깨닫던 날에는요

닦을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나를 조롱하듯 천천히 멈춰있는 나를 지나칩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만큼 빠르다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달라질 수 있을까요

갈기갈기 찢겨 붙이지도 못하고 
꿰매지도 못할 거라고 당신의 발자국은 말했습니다.
길을 찾지도 못하도록 신발을 거꾸로 신었던가요
일부러 함부로 어지러이 다녔던가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다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시작과 끝 시작과 끝 시작과 끝이 있고
시작과 끝 시작과 끝 시작 끝 끝 끝 끝 
시작 없이 끝만 내고 싶습니다.

베지 못하는 과육의 씨처럼 단단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끝이 있을 거라고 날카로움의 끝에서 안심합시다.
결국은 닿을 거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