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작은 전쟁을 겪었어요”
“그날 우리는 작은 전쟁을 겪었어요”
  • 고혜주·강서영 기자
  • 승인 2021.11.23 15:46
  • 호수 14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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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Prologue
2010년 11월 23일에 발발한 연평도 포격전(이하 포격전)은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민과 영토를 향한 최초의 포격이었다. 본지에서 실시한「국가안보 관련 재학생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101명)의 74.2%가 포격전에 대해 ‘대략적으로 안다(발발 시기 정도)’ 혹은 ‘잘 모른다’고 답했다. 이는 82.5%가 북한에 안보 위협 혹은 두려움을 느낀 경험이 있다는 결과와 대비됐다. 오늘은 포격전으로부터 11년이 지난 날이다. 과연 연평도는 어떤 오늘을 보내고 있을까. 직접 그 이야기를 듣고자 기자는 연평도로 떠났다.

연평도에서 북한 도서의 전경이 육안으로 보인다.
연평도에서 북한 도서의 전경이 육안으로 보인다.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내 한 목숨 조국에 바친다
연평도에 발을 디디자 부두는 해병대와 해경의 마크가 새겨진 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생소한 광경에 사뭇 긴장한 기자는 괜스레 가방을 고쳐매며 해병대 포7중대 안보전시관을 방문하기 위해 연평부대 최성윤(공보정훈과장) 대위를 만났다. 이동 중에는 연평도의 주둔군인 연평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 전쟁 중 서해 도서들을 사수하기 위해 연평도에 최초 상륙한 연평부대는 연평도서 방어와 지역주민의 안전 보장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최 대위는 “서해 북방 한계선(NLL)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연평도는 북한과의 우발상황 발생 가능성이 상존한다”며 “부대는 항시 최고도의 대비태세를 유지해 오늘 밤이라도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곳을 지켜오며 어떤 다짐을 해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 포상 바로 앞에 떨어진 포탄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 포상 바로 앞에 떨어진 포탄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검문을 마치고 들어간 안보전시관의 포상(砲床)은 북한의 방사포 파편이 박혔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포탄 하나로 거대한 포상이 그을리고 패인 모습을 보며 그 위협을 체감했다. 반원 형태의 진지 벽면에는 포격전에 참전했던 해병 명단 동판과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파노라마가 붙어있었다. 최 대위는 “북한의 무차별적인 기습포격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우와 주민, 가족을 지켰던 연평부대원들의 전투위상과 성과가 담겨 있다”고 전했다.


파노라마의 오후 4시 15분과 오후 5시 43분 지점에는 故 문광욱 일병과 서정우 하사의 사진이 있었다. 11년 전 그날, 20대의 두 해병이 자신의 정의를 지키며 전사했다. 그중 한 명은 우리 대학의 교정을 거닐던 선배기도 했다. 기자는 사진을 향해 짧게 인사한 후 그들의 자취를 쫓아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전시관을 떠나는 기자의 눈에는 해병대 마크 속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후에 찾아보니 ‘내 한 목숨 해병대라는 조직과 조국에 바친다’는 의미가 이어져 있었다.


여전히 기억될 자리
문 일병의 전사지에는 태극기가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포격전 당시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임무를 준비하던 문 일병은 북한의 포탄 파편에 맞아 산화했다. 당시 그는 연평도에 전입온 지 채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병이었다.


마지막 휴가를 위한 출항 직전 북한의 포격 소리를 들은 서 하사는 부대로 복귀하는 도중 포탄을 맞고 산화했다. 그의 전사지는 방공포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아스팔트는 움푹 패여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앞 소나무에는 서 하사의 모표(帽標)가 박혀있었다. 촬영을 위해 둘러보던 중 마주친 최 대위의 고요한 눈빛에 기자는 함께 침묵했다.

▲ 움푹 패인 도로의 그을림과 소나무에 박힌 모표(노란색 원)는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 움푹 패인 도로의 그을림과 소나무에 박힌 모표(노란색 원)는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어 포격전 당시 민가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안보교육장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기자가 마주한 것은 전소된 3채의 민가였다. 그 앞에는 기자의 허벅지 부근을 웃도는 높이의 포탄 하나가 묵직하게 박혀있었다. 피폭된 가옥과 포탄을 번갈아 보고 있는 기자를 향해 김영순(59) 연평면 문화관광해설사는 “그날은 바람 한 점 없던 덕에 3채만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바람이 많이 불었다면 연평도의 모든 집이 불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관 내부에는 포격전에서 활약한 군인 6명의 사진과 함께 문 일병과 서 하사의 군복이 전시돼있었다. 2층에는 포격전을 재현한 영상이 나오고, 왼쪽과 오른쪽 화면엔 각각 당시의 우리나라와 북한의 상황이 대치돼 전개됐다. 기자는 양측을 한눈에 담기 위해 바쁘게 고개를 돌렸다. 영상이 끝나자 김 해설사는 “북한의 포탄은 대부분 바다로 떨어졌는데, 조준 실력이 좋지 않다는 증거”라며 “발포한 포탄의 개수보다 포의 성능과 조준의 정확성이 중요하다”고 우리 군의 승리 배경을 덧붙였다.

▲ 포격전 당시 전소된 민가는 간신히 그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다.
▲ 포격전 당시 전소된 민가는 간신히 그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다.

 

피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온 내 집
안보교육장을 뒤로하고 기자는 김 해설사와 함께 대피호를 찾았다. 기자가 방문한 1호 대피호는 466명 정도가 수용 가능하며 안에서 30일 이상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생필품과 의료시설이 구비돼있다. 비상 상황 발생 시에는 마을 곳곳에 설치된 사이렌과 방송망을 통해 상황을 알리고 대피호별로 지정된 군인의 안내에 따라 대피소로 이동한다.


대피호는 4중 구조로 이뤄져 있었고 생필품과 의료품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책과 주방 시설도 존재했다. 한쪽에는 구호 물품들이 천장에 가까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김 해설사는 구호 물품의 일부만 대피호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며 “옹진군청, 백령도와 함께 물품을 일부씩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는 저 상자들이 전부가 아니란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 대피호 강당은 가장 안쪽에 위치해 동시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 대피호 강당은 가장 안쪽에 위치해 동시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평도민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기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함상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도민 박규동(85) 씨를 만나 대화할 수 있었다. 그와 가벼운 담소를 나누길 잠시, 기자는 조심스레 포격전 당시의 일화를 물었다. 굴을 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그는 “포 소리가 나길래 그저 훈련 중인 줄 알았다”며 “인천으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의 외침에 장화랑 모자를 뒤뜰에 내던지고 따라 나갔다”고 말했다.


어선을 타고 연평도를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포격이 계속 떨어져 배에 불이 붙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박 씨의 눈에선 그날의 두려움과 공포가 느껴졌다. 가족이 내륙에 있다는 그에게 연평도로 돌아온 이유를 묻자 그는 “내 집이니까 돌아와야지”라며 담담히 답했다. 그의 담담한 어투에 기자는 선뜻 반응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그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기자를 격려했다.

 

연평도민과 군인의 오늘
기자는 다시 찬찬히 마을을 둘러봤다. 곧 그중 커다란 공사장이 시선을 끌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행인에게 무슨 공사를 진행하는지 묻자, “포격전 피해 지원의 일환으로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금 마을을 걸어 다니니 공사장 맞은편에는 복구된 주거공간과 망가진 왼쪽 벽면이 그대로 이어져 있는 집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어 마을 곳곳에는 아직 수리되지 못한 채 11년 전의 흔적을 품고 있는 담벼락과 민가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걸은 후 목을 축이러 들어간 카페의 옆 좌석에서 우연히 남북 안보와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을 들은 기자는 인터뷰를 시도했다. 연평도 토박이라는 조철수(72) 씨는 “포격전 이후 평화가 온 것 같지만 불안함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예전보다 어업이 어려워졌다는 그는 남북 간의 대립 상황으로 어업 경제가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며 말을 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출항을 위해 다시 들어간 연평바다 역에서 기자를 배웅 나온 최 대위와 다시 만났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오늘도 대한민국의 안보수호를 위해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늘 마음 한켠에서 아낌없는 관심과 응원 부탁한다”고 말했다. 인사를 끝내고 돌아선 기자는 군인들이 출도(出島)의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배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연평도에서 돌아온 기자는 천안캠퍼스 사회과학관에 위치한 서 하사의 추모비를 찾았다. 비석에는 ‘그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곳에 있을 수 있음을 우리 대학은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앞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63.4%가 추모비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응답했다. 설문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되돌아봤다는 오수민(전자전기공·2) 씨는 서 하사와 같이 전방을 수호하는 장병들에게 “빛나는 청춘을 바쳐 우리나라를 지켜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했다. 기자도 이 자리를 빌려 연평도민과 장병들에게 경의를 전하고 싶다.

▲ 서 하사의 추모비에는 그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서 하사의 추모비에는 그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pilogue
김 해설자는 포격전에 대해 “작은 전쟁을 겪었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도민들은 연평도로 돌아왔고 장병들은 지금도 국민의 안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과 정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평도민이 이전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평화로운 오늘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평도민과 장병들을 향한 국민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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