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호이’ 세상의 즐거움과 만남의 행복함을 그려내다 - 김수정 만화가
‘호이호이’ 세상의 즐거움과 만남의 행복함을 그려내다 - 김수정 만화가
  • 임수하
  • 승인 2021.11.23 16:31
  • 호수 14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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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72) 만화가

 

 

Prologue
오랜 시간 우리를 울고 웃게 한 한국 만화의 뒤편에는 등장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이야기에 재미와 의미를 담아내는 만화가가 있다. 수많은 만화 캐릭터 중 2003년 명예 주민등록증까지 받은 국민 캐릭터를 아는가. 만화에서 시작해 TV 애니메이션, 극장판 영화까지 섭렵한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가 그 주인공이다. 재치 있는 대사와 자꾸 생각나는 이야기로 둘리와 친구들을 만들어낸, 한국 만화계의 살아있는 역사 김수정(72) 만화가를 만나봤다. 

 

▶ 자기소개 부탁한다.
둘리 아빠, 만화가 김수정이다.

 

▶ 처음 만화가의 꿈을 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초등학교 입학 전 우연히 형들을 따라 들어간 골목 안 만화 가게에서 만화를 보게 됐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만화를 흉내 내 그리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만화가를 꿈꾸기도 전에 현실이 나를 이끈 것이다.

 

▶ 만화가가 되는 데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
가족과 친구 모두 반대했다. 직업으로서의 만화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전망이 밝지 않고 작가로서 성공 여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고집으로 많은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 만화 일을 하다 다른 업종을 경험하기도 했다. 다시 만화 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만화 일을 하면서 겪은 극빈자의 삶은 가혹했다. 이에 당시 한국에는 중동 석유자본 광풍이 불어 중동에 2~3년 다녀오면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였고, 이에 돈을 벌고자 중동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1년여를 기다려 중동 진출이 성사될 때쯤 이를 포기했다. 경제 사정이 나아진 후에도 돌아와 만화를 다시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여고시대』에 「오달자의 봄」을 연재할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중동 진출 의지를 꺾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 경상대 축산학과에 진학했다가 중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가고 싶었던 학교는 지금의 중앙대인 서라벌예술대의 미대였다. 하지만 돈도 없고 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다. 그렇게 진학한 축산학과는 내가 원하던 진로가 아니었다. 그래서 21세에 입대해 24세에 전역한 후 1년간 방구석에서 만화를 준비했다. 이후 1975년 ‘소년한국 신인 만화가 모집’에 당선돼 작가로 데뷔하게 되면서 처음 다니던 대학은 중퇴를 했다. 

 

▶ 만화가가 된 이후에도 53세의 나이로 인덕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입학한 계기가 궁금하다.
나는 오프라인 세대다. 40대 중반에 처음 컴퓨터를 접했고 컴퓨터를 끌 줄 몰라 전기 코드를 뽑았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를 배우고 싶어 학원에 다니기도 했으나,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 50대의 나이에 대학에 다니면서 적응이나 학업 면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젊은 학우들이 많이 도와줘 멋진 학창 시절을 경험했다. 수업 외적으로는 젊은 친구들의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배운 3D의 기초는 작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때마침 자동차 광고에 들어갈 둘리와 친구들을 디지털 작업하는 데 한몫했다. 

 

▶ 만화를 그리며 많은 심의와 검열을 경험했다고 들었는데, 당시에 이를 어떻게 대처했는가. 
심의실과 일대일로 싸웠다. 부당함에 대해서 그냥 묵과하기엔 너무 억울하고 속이 쓰렸다. 그러나 별로 성과도 없었다. 대신 『아기공룡 둘리』 주요 등장인물을 사람 대신 동물로 의인화함으로써 서슬 퍼런 심의를 다소 완화해갈 수 있었다. 똑같이 나쁜 짓을 해도 캐릭터가 사람인 것보다 덜 나빠 보이지 않나. 

 

▶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제작 당시 어려움은 없었나.
제작비 조달, 능력 있는 애니메이터 확보, 기술력. 나와 기획팀은 이 세 가지를 예상 어려움으로 염두에 뒀고 기획부터 개봉까지 준비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개봉 시기에 앞서 개봉한 국산 애니메이션들이 극장에서 참패하며 국산 애니메이션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극장에서 문전 박대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10여 개의 공연장을 대관해 개봉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30만 관객을 끌어모았고 그해 한국 영화 관객 동원 4위를 했다.

 

 

▶ 국내 캐릭터 사업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에 ‘둘리나라’를 설립해 캐릭터 사업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둘리나라’ 설립 전 둘리를 관리해주던 업체가 있었는데 독자를 포함한 소비자들에 대한 부실한 대응과 영혼 없는 캐릭터 장착상품은 작가를 화나게 하고 실망하게 했다. 때마침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과감하게 회사를 설립했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계속해서 관리할 수 있는 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2009년 떠난 캐나다에서 돌아와 처음 낸 작품이 만화가 아닌 아동소설이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딸과 친구들, 집 앞 숲을 배경으로 한 글인데 처음부터 소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만화로 작업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감을 잊지 않기 위해 쓴 글을 소설로 먼저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화를 그리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려 처음부터 만화를 그릴 걸 그랬다.

 

▶ 데뷔 이후 꾸준한 창작 활동을 하는 비결이 있는가.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인 것 같다. 좋은 생각은 정신건강에도 좋고 몸에도 좋은 에너지가 쌓인다. 이전에는 주 6일 2시간씩 근력 운동을 했고, 지금은 집에서 주 5일 덤벨로 운동하고 있다. 운동은 거의 평생 해 온 것 같다.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 관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 작품활동의 원동력과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도전이 아닌 삶이라고 생각한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사악하지 않고, 간교하지 않고 우둔할 정도로 내 길을 가다 보면 새로운 힘도 솟아날 것이다. 

 

▶ 작품을 창작할 때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담고자 하는 철학이 있나.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 설레고 옛 독자를 만날 때 기쁘다. 언제나 독자들이 내게 힘이 돼 주듯, 나도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을 보는 즐거움과 사람을 만나는 행복함을 드리고 싶다.

 

▶ [공/통/질/문]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두 글자는 무엇인가.
전부.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여러분과 얼굴을 맞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삶이 절망스러운 건 우리 모두 벼랑 끝에 서 있기 때문이고, 그 벼랑을 벗어나면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삶은 아름답다. 모두 건강하길 바란다. 

 

Epilogue
자신이 사랑하는 일도 직업으로 갖게 된다면 결국 힘들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만난 그는 창작과 만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기자를 포함한 많은 청년은 앞으로 자신이 사랑하고 꿈꾸던 일에 도전하면서 여러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지키고자 회귀했던 김 만화가처럼, 어려움이 닥쳐도 사랑하는 일의 기쁨을 잊지 않고 자신의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임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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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rolla79c0@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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