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아누스 미라빌리스’
청춘의 ‘아누스 미라빌리스’
  • 양영유(커뮤니케이션) 교수
  • 승인 2022.03.22 16:36
  • 호수 14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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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커뮤니케이션) 교수
양영유(커뮤니케이션) 교수

봄이 살포시 다가왔다. 봄은 설렘과 희망의 계절이다. 새로운 계획과 출발, 꿈이 용솟음치는 봄은 역동적이다. 봄은 캠퍼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교정에는 젊음의 향기가 퍼진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심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청춘의 정열을 방해한다.


그래도 청춘은 강건하다. 결코 굽히지 않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처럼 “청춘이 파괴 될 수는 있어도 퇴폐할 수는 없다(A young can be destroyed but not be defeated).”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청춘이다. 청춘의 힘이다.


팬데믹 시대라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무언가에 몰입할 기회의 시간일 수 있다. 아이작 뉴턴도 청춘의 몰입을 통해 인류 문명을 바꿨다. 뉴턴이 스물세 살 때인 1666년, 영국에 페스트가 덮쳤다. 당시 런던 인구 46만 명 중 7만5천명이 희생됐다. 뉴턴에게 그 절망의 시기는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였다. 라틴어인 아누스 미라빌리스는 평생의 성취가 집중된 ‘기적의 해’를 의미한다.


뉴턴은 대학이 문을 닫자 낙향했다. 평범한 청년이던 뉴턴은 사고의 힘을 키웠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았다. 백색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는 빛의 신비와 수학의 새 지평을 연 미적분을 창안했다. 절망의 시기에 3대 발견의 기초를 다졌다. 페스트가 창궐하지 않았다면 뉴턴의 사과나무 아래 발견이 이뤄졌을까?


청춘은 도전이 특권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절대 단념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말라”(윈스턴 처칠), “시도가 무참히 깨져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 보다 낫다”(로더릭 매키넌)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도전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어서다. 도전의 경험은 성공의 싹이다. 두드려야 창조한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구상하는 데에만 15년을 매달렸다. ‘가지 않은 길’로 유명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작품 중 92%를 마흔을 넘긴 나이에 쏟아냈다.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예순 전후에야 스타가 됐다. 이들은 청춘 시절의 고뇌와 방황, 도전과 실패를 평생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청춘의 역동적인 도전이 그 밑거름이다.


캠퍼스는 젊음의 용광로이자 지성의 발광체다. 온 고잉(On Going) 코로나 시대를 낭비해선 안 된다. 이 순간에도 세계의 젊은이들은 ‘기적의 해’를 만들기 위해 도전하고 도전한다. 도전의 출발점은 창발성이다. 조셉 슘페터가 설파했듯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중요하다. 사고의 틀을 넓히고 세상을 보는 촉을 다듬어야 미지의 문을 열 수 있다. 정보를 찾고 지식을 축적하고 경험을 쌓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캠퍼스 도서관에는 책 대출 경쟁이 벌어져야 하고, 토론의 아고라는 시끌시끌해야 한다. 캠퍼스의 봄이 설레는 까닭이다. 올해 봄은 단국대생에게 아누스 미라빌리스가 될 수 있다. 창조의 자양분을 살찌우자. 좋은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청춘에게 봄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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