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이해한 공동체의 의미
비로소 이해한 공동체의 의미
  • 강서영 기자
  • 승인 2022.03.22 16:31
  • 호수 148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합지원센터가 어디죠?” 광주공항에서 택시를 탄 기자가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로 향해달라고 요청하자 택시 기사가 건넨 첫 마디였다.


목적지를 모르겠다는 대답에 당황한 기자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대신 입력하며 월곡동으로 출발했다. 택시 기사에게 듣기로 고려인 마을은 광주 시민들에게 그다지 유명하진 않은 듯싶었다. 오히려 기자는 “월곡동이 얼마나 큰지 모르냐”며 핀잔까지 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기사는 고려인 마을이 어떤 동네냐고 물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준비된 대답은 없었다. 손에 있던 정보로 그에게 마을을 설명해봤자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웃으며 기자도 그걸 알아내러 가는 길이라 답했다.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대표를 주축으로 커진 고려인 마을은 개인이 가족이 되고, 가족이 대를 잇는 거대한 공동체로 자리잡혔다. 먼저 발붙인 고려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의 작은 정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소문나 많은 이주민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광주 고려인 마을로 찾아와 정착하게 됐다. 여기서 기자는 왜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 모든 것을 지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한민족이라 해도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에게, 고려인을 넘어 다른 국가의 이주민들까지 포용해 복지를 지원하는지. 그들의 선의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신 대표는 마을 주민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자가 의문을 품은 찰나가 민망해진 순간이었다. 처음 본 기자를 보자마자 아침은 먹었냐며 음식을 대접한 그의 모습에서 이 마을의 고유한 원칙으로 자리 잡힌 배려가 느껴졌다. 마을을 구성하는 개인은 단순한 구성원이 아닌 가족이었다.


고려인들에게 처음 발 딛은 한국은 조상의 나라라고 할지라도 낯선 땅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낯선 곳에서 자리 잡고 새로운 고려인들의 정착을 돕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더욱이 쉽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있었기에 마을 구성원들과 각종 복지 사업이 힘을 모아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꿔나갈 수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이웃과 마주치면 인사는 당연했고 대화와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화는커녕 인사하기도 어색한 사이가 됐다. 그래서 기자에게 ‘나의 이웃’은 어느샌가 단순한 ‘옆집의 타인’이 됐다. 당연했던 이웃의 의미를 잊었기에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에 물음표를 던졌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도움이 오지랖이 되고, 타인을 향한 관심이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결국 기자도 이러한 사회에 익숙해진 채 고려인 마을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 돼 베푸는 개념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면, 사회가 분열을 멈추고 하나가 될 가능성이 무한해지지 않을까. 조그만 시선의 변화가 배려 넘치는 사회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돼줄 것이다.

강서영 기자
강서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westzero@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