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水面)
수면(水面)
  • 김시연(보건행정·3)
  • 승인 2022.04.05 14:13
  • 호수 14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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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긴 시간 동안 저는 수면 위를 걷고 있습니다. 걷고 또 걸어서 처음에 봤던 수평선 그 너머에 도착했습니다. 더이상 제가 어딘지도, 목적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처음의 방향 그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하염없이 걷게 된 이유조차 희미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는 언젠가 육지가 나올 것이라 믿고 수면 위를 걷고 있습니다. 

 

저는 보통 수면 위를 걸으면서 물결을 지켜봅니다. 무서울 정도로 잔잔한 물결이지만 어디선가 슬픈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이 향기를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눈가에 서글픔만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지금도 물결을 따라서 걷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수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분명 처음엔 이 물결이 잔잔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처음엔 이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분명 처음엔 누군가가 저를 이곳으로 밀어냈습니다.

 

그가 생각이 납니다. 그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곳으로 밀어낸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적도 없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육지 따위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걷는 이유 따위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이란 수면 위에 서 있던 저는, 심연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처음 다가왔던 파도는 “슬픔”으로, 점점 사그라들어 잔잔해진 물결은 “미련”이 됐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수면 위에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수면 위에 있던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에게 빠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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