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곳을 물들게 했나
무엇이 그곳을 물들게 했나
  • 신동길 기자
  • 승인 2022.05.17 13:55
  • 호수 149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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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이 검게 물들었다는 비보는 어린 기자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후 1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자는 태안을 ‘비극의 현장’이었다고만 사추(邪推)했었다. 태안은 아직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역인 줄 알았고, 주민들은 아직도 기름과 씨름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해내고 싶었던 기자는 태안으로 향했다.

 

태안에 온 기자는 무턱대고 바다로 달려가 사고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찾고 싶었고, 찾아야만 했다. 사고의 흉터를 두 눈으로 직접 바라봐야 이곳에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푸른 파도와 깨끗한 백사장만 존재했고 그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표적은 주민들이었다. 15년이 지난 자연은 깨끗해졌을지 몰라도, 주민들은 여전히 그 후유증을 앓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기자는 용기를 내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한 어부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건 한숨 섞인 반문이었다. “1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다룰 게 있어요?”라는 되물음에는 지금까지 지겹도록 받았던 관심과 이로 인한 피로가 묻어나온 것만 같았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기자님도 여기가 오염돼 보이나요? 보이지 않는 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기자는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기자는 이곳에서 꼭 사고의 흔적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번 취재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행복하고 편안한 태안의 모습만 담는다면 기사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 속단한 기자는 어떻게든 문제점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기자의 욕심은 그들의 아픈 상처 위에 뿌려지는 한 움큼의 소금이 됐다. 기자에게 태안은 그저 하나의 기삿거리에 불과했으며 주민들은 단순히 한 명의 취재원일 뿐이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히 여긴 기사였지만, 정작 그 기사에 담길 이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고 이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순간적인 상념에서 빠져나온 기자는 드디어 15년 동안 이어진 사추를 멈췄다. 그리고 태안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많이 아문 그들의 상처를 굳이 헤집지 않고서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결국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흔적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자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를 꿈꿨지만, 지금까지 기사로 작성했던 건 ‘기자가 원하는 대로 바라본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다만을 바라보던 한 어부의 반문은 ‘기삿거리’에만 매몰돼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던 기자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였으리라. 

 

취재 기간에 마주한 태안 바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이런 태안 바다를 검게 물들게 했던 건 원유가 아니라 기자 같은 사람들의 무지한 사추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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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gshin2271@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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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와경휘 2022-08-05 22:04:35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 혹시 책을 쓰실 생각 있으시나요?

큰일 냈네 2022-05-18 11:05:32
멋있어요 항상 멋진 글 감사합니다

대앰 2022-05-18 01:15:05
잘자요 제발 한 번ㅁ

2022-05-18 00:36:28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