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잉크보다 더 짙게 자유를 새기다-조명신 의사
검정 잉크보다 더 짙게 자유를 새기다-조명신 의사
  • 이소영 기자
  • 승인 2022.05.17 14:07
  • 호수 149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명신(58) 의사
▲ 조명신 의사가 자신이 그린 문신 도안을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중앙SUNDAY〉
▲ 조명신 의사가 자신이 그린 문신 도안을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중앙SUNDAY〉

 

Prologue
1992년 대법원이 문신 시술을 의료 행위로 판단한 이래 의료인만이 문신 시술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의사가 아닌 일반인 시술자는 이미 35만 명을 넘어섰고 시장 규모는 1조2천억 원에 다다랐다. 문신 시술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문신 기계를 다루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의사이자 타투이스트 조명신(58). 그를 명동역 앞 성형외과에서 만났다.


▶ 자기소개 부탁한다.
23년 동안 문신 시술과 성형 수술을 함께 하고 있는 조명신이다.


▶ 문신 시술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1999년에 색채로 된 장미 문신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의사로 일하며 문신 제거를 수없이 해 왔지만, 이전까진 한 번도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문신을 본 순간 지우기 아까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문신을 배워 볼 만한 것이라 여겼다.


▶ 문신을 배운 과정을 듣고 싶다.
그 손님에게 장미 문신을 어디서 받았냐고 물어봤다. 오산 공군 미군 부대 앞의 한 타투이스트에게 받았다는 답을 듣고 무작정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6개월간 기본적인 시술 방법과 기기 구매 절차를 배웠다. 그 후 안양에 문신을 전문적으로 새기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안 뒤에는 그곳에서도 교육받았다.

 

▶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2주가량 문신을 배웠다고 들었다. 
그때가 2003년이었는데 당시 문신의 본고장은 미국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국내 시술을 꽤 했었지만, 실력에 자신이 없어 무료 시술만 했었다. 그러던 중 배움에 대한 갈증을 충족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미국 문신 학교로 향했다. 배울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기초적인 부분을 배우고 여러 시술 경험을 쌓았다. 그 후부터는 자신감이 생겨 작업에 돈을 받기 시작했다.

 

▶ 수술에서 문신까지, 손재주가 좋은 편인가.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렸을 땐 라디오 부품을 사서 조립하기도 했고 요즘엔 부시크래프트(Bushcraft)가 로망일 정도다. 하지만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 그렇다면 조명신의 문신은 어떤가.
요즘엔 ‘K-타투’라고 불릴 정도지만, 문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누군가의 예술적 감각과 개인의 손에 의해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생대로 문신은 표현된다. 조명신만의 문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뿐이다. 고객의 몸에 새기는 일이고 평생 본인이 볼 것이지 않은가. 소비자가 원하는 문신이 곧 조명신 문신의 정체성이다. 

 

▶ 시술했던 문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나.
하나하나 다 소중하다. 시술받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문신은 다 기억한다. 그래도 하나를 고르자면 15년 전 부자(父子)에게 했던 문신이 떠오른다. 아들이 엄한 데서 시술을 받을까 걱정돼 의사에게 함께 왔다던 아버지는 시술이 끝날 때쯤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아들과 세대 차이가 나서 대화가 별로 없었는데 문신 시술 과정에서 의논하고 같이 관리하면서 행복했다는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 이때까지 작업한 문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신은. 반대로 가장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문신도 궁금하다.
시술을 받은 사람만 만족하면 상관없다. 아무리 잘 그려 봐야 받은 사람이 만족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망한 문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완의 문신만 있을 뿐. 작업 중 실수를 했던 적은 있다. 레터링 문신의 경우 원하는 글씨체가 아니라든가, 획을 잘못 새기면 아주 난감하다. 문신 제거를 겸하는 의사이기 때문에 제거하고 다시 새겼지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 문신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 이들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
그들을 극복하거나 설득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밀고 나가는 성격이다. 성형 수술로 돈을 많이 버는데 문신 시술을 왜 해 주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고 싶은 걸 지금 하지 못하면 언제 할 수 있겠나. 내가 하는 일이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은 아니기에 그냥 했다.

 

▶ 치매 노인 실종 방지 문신이나 사회에 공헌하는 이들에게 문신을 무료로 하고 있다.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는지. 
공익적인 일이 사적으로 추구하는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있어야 개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가치관에서 시작하게 됐다.

 

▶ 현행법상 문신 시술은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의료 행위다. 의사로서 문신 법제화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극도의 소수만이 합법적으로 문신을 새길 수 있다고 규정되는 게 이상하다. 하루 빨리 사회적 시스템이 개선돼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이 법제화되길 바란다. 

 

▶ 문신 이력보다 특이한 이력이 있다. 남극은 어떻게 다녀오게 됐나.
20대에 장교로 복무를 해 40개월을 군대에 있어야만 했다. 어차피 있어야 하는 거 평범함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을 지원했다. 남에게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 탄광에 1년 동안 부속 의원으로 있기도 했는데.
새까맣게 탄을 뒤집어쓴 사람이 진료가 필요한 상태로 나오면 진찰을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부분이 자는 시간에 누군가는 탄을 캐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며 삶의 다양성을 느꼈다. 평범한 의사로서는 겪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었다.

 

▶ 서울대 공대에서 최고 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50세엔 한양대 매머드 연구 박사 과정을 밟기도 했는데, 계속해서 여러 분야에 도전하는 이유를 꼽자면.
하고 싶어서 했다. 사실 꿈은 인디아나 존스처럼 세계를 돌며 인류에 남길 만한 업적을 쌓는 것이었다. 의료 문신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원한 바는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50살이 되면, 보통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새 출발을 한다. 나 또한 때마침 50살을 맞아 잊고 지냈던 꿈을 생각하다 보니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었다.

 

▶ [공/통/질/문]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자유. 자유 없이는 살 수 없다. 자유는 있을 때는 모르고 잃어 봐야 소중한지 알게 된다. 돈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돈만 가지고 살 수 없다. 자유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없다.

 

▶ 마지막으로 문신을 하려는 재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신중히 생각하고 해라. 신중히 생각했으면 해라. 평생을 못 하는 거보다 후회하는 게 낫다. 순간적 감정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면 해 보길 권한다. 

 

 

Epilogue
인터뷰 마무리 무렵, 기자는 주저하는 청년들에게 전할 말을 물었다. 그는 단숨에 “계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다.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그가 타인을 배려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의술과 예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왔다. 딱히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자기 삶을 자유롭게 사는 모습만으로 응원받을 수 있다.

이소영 기자
이소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943platform@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성숙 2023-03-23 15:34:29
Tv보고 존경하게 됐네요
뭔가 뭉클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