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의 젠더 해방
구찌의 젠더 해방
  • 김희량 패션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2 16:47
  • 호수 14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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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cci 2022 Fall Ready-to-wear 출처: WWD
▲ Gucci 2022 Fall Ready-to-wear (출처: WWD)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수민이라고 부르겠다. 수민이는 작은 일에도 깔깔거리며 웃는다. 수민이는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수민이는 섬세하다. 그리고 수민이는 남자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성애자다. 수민이는 소외됐던 학창 시절을 고백한 적이 있다. 수민이의 말투와 행동, 취향들은 친구들이 볼 때 ‘여성적’이었고, 남자인 수민이가 ‘여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놀림거리이자 비난거리였다. 하지만 수민이는 성 정체성이나 지향성의 문제를 떠나 수민이만의 고유한 성격과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수민이에게 ‘여성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건 타인이었고, 수민이는 자신만의 방식에 누가 느닷없이 이름을 붙이고 손가락질하는 일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한 명의 개인인 우리는 집단으로 묶이면서 단순한 특징 몇 가지로 평준화된다. 사회 시스템은 들쭉날쭉한 개인의 특성은 없애고, 일정한 기준에 맞춘 값을 보고 싶어 한다. 유형을 나누는 것은 다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해서 유한한 분류체계로는 수많은 삶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우린 보통 이 사실을 간과한다. 뚜렷하게 대상을 판별하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잘 떠올리지 못한다. 


사람을 가르는 대표적인 특징 중 젠더에 대해서는 특히 분류 기준이 엄격히 부여된 편이다. 우린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진 분류체계 속에 모든 형용사와 성격과 말투와 태도와 직업과 가능성을 둘로 나눴다. 태어난 순간부터 절대적 규칙처럼 흡수해온 기준이다. 예외는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으로 취급됐다. 섬세한 남성과 과격한 여성처럼. 


이 엄격한 분류체계가 시각적으로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분야는 패션이다. 오랜 옛날부터 의복은 여성복과 남성복으로 구분돼 왔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남성의 직업 영역이 확대되면서 남성복은 단순화되고 여성복은 화려해지는 등 그 차이가 더욱 벌어졌다. 패션은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구분하는 선명한 코드이면서, 그 성격과 태도까지도 규정하는 방식이다. 치마나 바지와 같은 옷의 종류로 나누기도 하고, 몸에 꼭 맞는 실루엣으로 활동의 범위까지 다르게 정해두기도 했다. 즉, 젠더 구분이란 패션을 통해 더 엄밀하게 시각화되고 형상화됐다. 


그러나 패션은 구분 선을 뚜렷하게 그으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그 선을 지우려 애쓴다. ‘구찌’를 보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함께 등장하는 수식어는 ‘Gender Fluidity(젠더 유동성)’이다. 미켈레는 구찌를 맡은 2015년부터 젠더 구분을 무너뜨리는 시도를 보여줬다. 2015년 가을 남성복 패션쇼에는 프릴과 리본, 레이스가 달린 남성복이 소개됐고, 여성 모델이 함께 수트를 입고 등장했다. 같은 시즌 레디투웨어 패션쇼에도 남성 모델과 여성 모델이 모두 우아한 리본 블라우스와 각진 팬츠를 차려입었다. 최근 2022년 가을 레디투웨어 패션쇼에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델이 헐렁한 수트에 스틸레토 힐을 신고 나타났다. 미켈레는 8년째,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진 수많은 규칙과 코드를 이리저리 혼합해 젠더가 구분되지 않는 패션을 내어놓고 있다. 


미켈레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규정된 남성성이 유해하다고 말한다. 남성의 강하고 권력적인 모습만 부각하며, 개인의 특별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협소하게 제한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미켈레는 말한다. 나약함을 고백하고, 부드러움을 꺼내며, 타인을 보살피고, 다정한 남성의 모습을.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남성의 다른 가능성을. 젠더 구분의 중심이었던 남성성의 경계를 허물었을 때, 젠더의 정의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이 세상은 다채롭고, 그 다채로움은 축복이다. 고작 두 가지 조건으로 사람을 정의하는 세상이라 숨어야 했던 개인의 다채로움은 얼마나 쉽게 빛을 잃었을까. 분류와 구분이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예외를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기 시작한다면 기준을 허물때 비로소 억눌린 개인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견고한 구분이 아니라 예외를 아우르는 넉넉함이어야 한다. 당신은 구분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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