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본질
교육의 본질
  • 허재영(교육대학원) 교수
  • 승인 2024.05.09 16:05
  • 호수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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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다 보면 ‘효과적인 훈육 방법’이라는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감시는 생산도구에 내재해 있는 부품인 동시에, 규율과 징계의 권력 안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톱니바퀴인 한 경제의 결정적인 작용 요소가 된다.”는 서술과 함께, 감시의 특정화와 교육적인 관련 사항을 통합하는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다소 어려운 책이다. 엄밀히 말하면 감옥은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의 하나이자 사회 교화의 중요한 도구다. 푸코가 학교를 감옥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한 것은 두 기관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교육학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할 때면 어느 순간 무기력감에 빠질 때가 많다. 수많은 교육학자가 ‘교육이란 이런 것이다’는 식의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고, ‘이렇게 해야 올바른 가르침이다’는 방법론에 대한 논의도 헤아릴 수 없이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무엇이 교육이며 어떻게 해야 잘 가르치는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시대, 사회, 개별 상황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동양 고전의 하나인 『논어』에는 ‘가르침’을 뜻하는 ‘교(敎)’라는 표현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교’가 불과 7회에밖에 쓰이지 않았는데, 이에 비해 ‘배움’을 뜻하는 ‘학(學)’은 67회나 등장한다. ‘학’이나 ‘습(習)’은 가르치는 일보다 스스로 배우고 깨치는 일에 방점을 둔 표현으로, 사람이 능동적으로 알고자 하고 깨우치고자 하는 일이 중요함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공자는 오직 ‘문행충신(文行忠信)’의 네 가지의 가르침만을 역설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학문과 실천, 충심과 신의로 번역하는 표현이지만, 공자의 4교를 이렇게 번역하면 정말 본질을 말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한국 교육사를 살피다 보면, 조선시대가 됐든 아니면 근대나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교육으로 어떤 사회문제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꽤 강하게 작용한 역사가 확인된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신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이러한 믿음은 통하지 않는다. 어느 때부턴가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심지어는 학부모와 교사의 갈등이 일어나면서 목숨을 끊는 선생님까지 나타나는 비극이 초래되기도 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배움’과 분리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표현이나, 현대 교육학에서 ‘교수’와 ‘학습’을 하나의 단위를 묶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학생을 존중하고 교수를 존경하는 학교 문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허재영(교육대학원)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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