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백묵처방
  • 김평호교수
  • 승인 2004.10.12 00:20
  • 호수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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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려운 시절에……

요즘 우리의 살림살이가 다들 어렵다한다. 취업난에 청년실업 문제는 사상 최악의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명예퇴직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이름으로 4∼50대에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사람들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모두 어려운 세상살이의 징표들이다.
‘일자리’라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차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일’이란 우리의 존재에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취업난이나 실업문제가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이것이 개인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과 사회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이 없거나 일자리에서 쫓겨나 자신의 삶에 뜻과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불안은 더 심해지는 것이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너나없이 민생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남한사회의 모듬살이가 갑갑한 것이 이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이 따져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바탕에는 정부나 정치권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과연 현재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면서 바람직한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낼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놓여있다. 사회의 미래에 대한 일정한 신뢰가 있다면 사실 현재의 어려움은 족히 견딜만한 것이 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가 맞고 있는 첨예한 이슈의 하나는 행정수도이전 문제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우리나라의 인력, 자본, 교육, 문화, 정치, 경제 등의 거의 전 역량이 사실상 서울로 집중되어 있다. 국가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도 이는 극히 위험한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부분 중 일부인‘행정’분야를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은 충분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과업이다. 이 같은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수도이전 문제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두 번째 사례. 지난 해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새만금 간척사업이나 부안 방폐장 문제는 우리 정부, 정치권, 그리고 우리 사회의 상당부분이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의 사고와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개발과 성장에 치우친 정책집행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대체로 부정적인 후유증이 더 심하게 마련이다. 지금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는 생태환경의 훼손상태는 바로 개발독재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국토의 난개발에 이어지는 후 폭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환경문제에 제대로 대응할만한 자세와 철학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사례. 지난 6월초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살해당하도록 우리 정부는 이렇다 할 대처도 하지 못했으며 그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조차 지금은 끝이 난 것인지 아닌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천 명 가까운 군인들을 도둑처럼 이라크에 보내놓고 정작 그들이 지금 어떻게 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에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인들을 파병했으면서도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해방이 된지 무려 60여 년이 되어 가는 2004년 지금 이 시점까지 대한민국이 적어도 미국과의 관계에서만큼은 식민지인지 주권국가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네 번째 사례. 사상의 자유라는 극히 당연한 기본권의 입장에서 마땅히 폐지되어야할 국가보안법을 사생결단 하듯이 보존하겠다고 나서는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등의 신문들, 그리고 자칭 ‘원로’라는 사람들은 한국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원하지 않는 매우 거대한 집단이 우리 주변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사회의 미래가 과거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친일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사실상의 쿠데타나 내란을 선동하며‘색깔론’을 들먹여 우리 사회의 이념적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이들은 또 ‘과거의 친일은 매국이지만 지금의 친일은 애국’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진실과의 대면을 회피하고 역사와의 단절을 꾀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할 때 현재의 고난은 결코 견디지 못할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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