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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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1.16 00:20
  • 호수 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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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에 서 있다. 지난 해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의 신화와 새 시대를 여는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새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 사회에 새 물결을 이루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두 새로운 ‘충격적 사건’은 21 세기 우리 사회 문화, 정치의 판도에 많은 변화의 파고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월트컵의 신화는 우리의 거리 문화의 새로운 세계를 펼치는데 성공하였고, 우리의 민족적 숨은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제의의 마당이었다. 이 통과제의는 우리의 의식을 한층 성숙시켰고, 앞으로 민족 단합과 주체로서의 아이덴티티 문화를 새롭게 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멀티 시대의 주체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입성하여 새 정치 물결을 정치의 큰 강으로 만들어 낸 지난 대선도 우리의 앞날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예보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리 정치의 낡은 관행이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권력을,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들었던 정치 행태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결과를 보여준 셈이다.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이탈된다는 국민의 정치 시대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거대한 변화는 대중과 수요자들의 자기 중심 찾기에서 비롯되었다. 수요자의 권리가 제작자 생산자의 독점을 저지하고 스스로의 수요를 창조하려는 사회 권력 이동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거느리고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대중들은 자기 개성에 따라 움직이며, 연대하며, 공감하며, 다중적인 주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대중 사회, 멀티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범박하게 말한다면 ‘!’의 문화이다. 정보가 급속도로 몰려오고, 정보의 황홀 속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 미학’의 시대가 갖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하겠다. 또한 하나의 정보가 급속하게 복제 증폭되어 주체를 압도하는 문화적 추세를 확산해 가는 시대, 멀티미디어 시대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멀티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앞에 폭주해 오는 정보에 압도되는 ‘수용의 자세’를 보이는 느낌표(‘!’)의 감동을 이제 물음표(‘?’)의 성찰과 반성의 미학으로 주체를 정립해야 하는 문화적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느낌표(‘!’)의 문화는 이제 또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했으며, 자성과 성찰의 주체를 인정하려 않으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 문화의 감동과 직선적인 관성을 보다 둥글게 문화와 시대의 정체성을 통찰할 수 있는 자성과 성찰의 시대의식을 필요로 한다. 이를 우리는 물음표(‘?’)의 문화의식이라 해 보자. 다음의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음미해 보자. 바로 물음표의 미학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는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바로 이 <알 수 없어요>는 민족주체성이 억압당하였던 닫힌 현실 속에서도 그 닫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주체를 성찰하고, 그 주체적 삶을 인식할 수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주체를 억압하는 현실 속에서도 주체를 인식하려는 성찰의 상상력을 통하여 닫힌 현실에 대한 뚜렷한 시대인식을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동시대의 많은 낭만적 정서를 담았던 느낌표의 시들이 현실을 수용하는 감정 편향을 보인데 반하여, 이 시는 주체 상실의 현실에 대한 성찰과 자성적 사유를 물음의 미학을 통하여 상상력의 세계를 확대해 나가면서 닫힌 현실의 장벽을 투철한 시대정신으로 관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 해 벽두에서 서서,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자아와, 시대와 민족의 현실에 대해 자문해 보자.

김수복 교수<어문학부 겸 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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