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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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영 수 교수
  • 승인 2004.11.23 00:20
  • 호수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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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학과 50년사’와 ‘동문의 밤’


김 영 수 교수
<인문학부·국어국문학전공>
필자가 본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은 1972년이다. 고3 시절 방황하던 때에 모교(배재)에 계시던 고 최신호 교수께서 황패강 교수님에게 추천서를 써 주셨다.
눈 내린 단국대 교정에서 처음 만난 분이 공교롭게도 황 교수님이셨다. 추천서를 보시더니 내게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시험을 치르고 기다렸으나 연락이 없자 학교에 와서 선생님을 뵈었더니 교무과에 데리고 가서 확인해 주셨다. 선생님은 성적이 좋다고 하시면서 입학식 때 신입생 답사를 작성해 오도록 하셨다.
나는 단국대에 대한 인상과 신입생의 입장에서 글을 써서 드렸더니, 읽어보시고 좍좍 고치시더니 내게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것을 충고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벽에 세우고 수정한 원고를 읽게 하시더니 하나 하나 고쳐 주셨다. 그렇게 연습을 마치고 3월 2일엔가 입학식 때 신입생들을 대표하여 선배들의 환영사에 이어 답사를 읽어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태릉 푸른동산에서의 신입생 환영회, 답사, 문학의 밤, 시화전, 연극공연, 연구발표회 등을 거치면서 낭만을 즐기기 시작했다. 필자는 고전문학에 관심을 두었고, 1973년 4월부터 황교수님이 이끄셨던 삼국유사 강독회에 참여하여 고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1987년 11월부터 강재철 교수가 인계 받아 이끌었고, 1998년 3월부터 필자가 이어가고 있다.

우리 국어국문학과는 1954년에 창립되어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 약 2년 전부터 몇몇 동문들이 발의해서『국어국문학과 50년사』를 만들기로 하고 기금과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50년 역사에 동문만도 2천명을 상회하는 규모이지만 정작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설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과는 학부제로 유지되고 있으며, 동문회 조직도 미미하여 무엇하나 만족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행히, 학과에 대한 애정과 재학시절 선후배의 돈독한 우정, 그리고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바탕이 되어 황무지를 일구는 심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동희 교수(2003년 8월 정년)와 송하섭 부총장을 공동위원장으로 모시고 일차적으로 모교에 재직하고 있는 동문들을 중심으로 자료와 기금을 모았으며, 편찬위원(김영수,윤승준,강상대,김명준,박상진)을 선정하여 집필하기 시작했다. 동문들의 격려와 협조로 이제는 막바지 교정을 보면서 행사의 날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초창기 5~60년대의 선배들은 향학열과 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초석을 쌓아 나간 역군들이었다. 7~80년대는 안정된 여건과 훌륭한 교수진을 바탕으로 황금시대를 열어나갔다. 90년대에 들어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면서 다양한 변화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모습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며칠전 50년사에 쓸 사진자료를 찾던 중, 황교수님이 필자에게 보내준 편지 두 통을 다시 펼쳐보았다. 교사추천서(77년 2월 10일)와 필자의 석사논문에 대한 평(80년 4월 7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석사논문지도를 선생님께 받고 싶었으나, 선생님은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아 2년간 연구를 위해 일본에 체류중이셨다. 논문을 부쳐 드렸더니 여러 이야기 가운데 논문 쓰는 자세를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신 것이었다.

“서론 부분 서두의 주정적(主情的)인 문장은 냉정해야 할 논문의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조심해야 할 줄 압니다……. 요컨대 간결하면서 명확한 표현이 되게 하십시오. 나도 좋은 본보기를 보이지 못했으나 인용문은 앞으로 번역(한문→국문)하고 될수록 쉬운 표현, 한자를 제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독자층을 많이 얻게 되고 공명자(共鳴者)를 갖는 기회를 늘여 주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이기에 더욱 매운 매를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가능성에 도전하십시오, 더욱 많이, 더욱 깊이, 연구하십시오.”
편지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이 와 닿는 선생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월 필자가 책을 낼 때에서야 비로소 선생님의 충고를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어제 50년사에 수록할 선생님의 휘호를 받으러 댁을 방문했었다. 선생님은 고심 끝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를 주셨다. “靑山不墨千秋畵 綠 水無弦萬古琴” 청산은 그리지 않아도 그 자체가 아름다운 그림이고, 녹수는 현이 없어도 물소리 자체가 만고의 절창이라는 뜻 일게다.
우리들에게 청산과 녹수가 되라는 무언의 주문인 듯하다. 국문과 출신 청산과 녹수들이여! 50년만에 함께 모여 문학과 인생과 술을 논하며 한남동을 다시 한번 누벼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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